이러려고 퇴사한 건 아니었는데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요

by 샌디

요즘 나의 하루는 지극히 평범하다.

느지막이 눈을 떠 커피 한 잔과 함께 좋아하는 노래나 영상을 틀어놓고 - 집안일을 하고 - 늦은 점심을 즐기고 - 공부나 독서를 한 뒤 - 사람들을 만나거나 운동을 간다.

몇 주 전도 분명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거절하지도, 받지도 못한 몇몇의 제안을 제대로 마주하기 전까진.


이직과 취업을 위한 다양한 커뮤니티가 있는 요즘, 종종 회사의 오퍼를 받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결과를 위해 나의 이력을 잘 정리하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PR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나 또한 퇴사 이후 각종 플랫폼에 올라와있는 나의 상태를 "적극적인 구직 중"으로 바꿔놓은 상태였다.

분명 당장의 취업이 급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처럼 굴러가는 대로 살지 말자", "이 기회에 내가 진짜 오래도록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자", 다짐하며 보내던 시기였으니 내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하기엔 3개월 남짓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빈 손으로 나온 사회는 어찌나 혼란스럽던지, 회사를 도망치면 선명해질 것 같았던 고민에 대한 해답은 현실적인 고민들에 마모되어 오히려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그래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데?", "현실적인 고민은 안 하니?", "너 이러다가 실패한 백수 인생이 되는 건 아냐?"


결국 [회사원의 퇴사 시 매뉴얼]이라는 궁색한 핑계를 대며 맘 속 한 구석에 마련해 놓은 "적극적인 구직 중"이라는 나의 상태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나의 조급함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나는 차마 수락하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애써 보류하고 있던 각종 오퍼들을 오만가지 생각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그 이후로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뚜렷한 답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그래,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요즘은 실력이라는데 이것도 키워볼 겸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지. 제안 온 곳들 중 비전이 있어 보이거나 유명한 프로덕트를 만든 경험이 있는 곳들은 한 번씩이라도 만나보자,라는 생각으로 나는 결국 몇몇 곳의 제안을 수락했다.




몇 주간은 꽤 많은 기업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업의 도메인도, 나의 포지션도 다양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곳에선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고,

서로 원하는 방향이 달라 자연스레 마무리되거나, 내가 2차 인터뷰를 고사하거나, 내부의 연봉 테이블이 맞지 않아 가지 못하거나 하는 등의 결과들로 자연스레 마무리 지어지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답 없이 나왔지만 역시 내 뜻이 맞았어.'라는 오만한 생각과 함께 자기 확신을 가질 때였다.

한 기업에서의 경험이 유독 나의 생각을 많게, 그리고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ㅁㅁㅁ은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었지만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프로덕트를 운영하고 있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대면 인터뷰 전부터 나를 상당히 지치게 만들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장시간동안 라이브로 진행해야 하는 사전 과제"때문이었다.

작은 기업부터 큰 기업까지, 요즘은 사전 과제가 흔한 프로세스 중 하나라 크게 거부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경우에 사전 과제 단계가 진정 필요했는지가 1차 의문이었고, 라이브로 진행되는 과제였기 때문에 시간 엄수가 중요했으나 미리 합의된 시간에도 과제 페이지가 10분 넘게 열리지 않아 결국 내가 연락을 먼저 해야 했다는 게 2차 의문이었다. 심지어 확인해 보니 과제 내용도 사전에 고지받은 것보다 방대해 결국 나는 몇 시간 내내 시간에 쫓기며 과제를 진행해야만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대면 인터뷰의 사전 단계로 진행하는 "인터뷰 사전 질문지"였다.

기본적으로 컬처핏을 알기 위한 질문지였다보니 단순한 답변을 요하는 것이 아닌 꽤나 깊은 사고를 요하는 질문들이 많았고, 내 기본 프로필에 대한 질문도 굉장히 세심하게 작성하게끔 구성되어 있었다. (이력서에 기재되어 있는 중복 사항 + 자소서 질문의 혼합 형태였다.) 하나의 질문도 거의 2 depth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대기업 면접에서도 경험하기 힘들었던 질문지를 스트레스받았던 사전 과제 이후에 작성해야 한다는 게 사전 과제를 뒤이어 나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험한 인터뷰는 근래에 본 인터뷰 중 가장 압박 면접에 가까웠다.

2시간 30분 가까이되는 인터뷰 시간 동안 나는 끊임없이 날아오는 꼬리 물기 질문들에 방어적으로 대답해야 했고, 날카로운 질문들엔 당황하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대답을 내놓기 위해 장고의 시간을 거듭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집중력도 눈에 띄게 떨어져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되묻기도 수차례.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내가 긍정적인 결과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결국 순간에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는 근처의 친구를 불러 맥주 한잔과 함께 나의 길었던 채용과정을 훌훌 털어버렸다.

그래, 이런 경험도 필요하지, 하면서도 나와 맞지 않는 기업이었구나, 하는 결론이 내려져 그날만큼은 맘이 정말 편했다. 계속 시선이 갔던 오퍼들에 답장하여 한 차례 결론도 내었으니 가뿐한 마음으로 다시 다음 도약을 준비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은 것만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통화가 가능하냐고 묻는 담당자의 연락을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돌아온 건 긍정적인 답변. 하지만 이미 맘속으로 결정 내렸던 나의 에두른 거절 의사를 들은 담당자분은 나를 열심히 설득하였고,


"내부에 좋은 조건을 제시할 테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라며 짧은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좋은 조건'


생각이 많아졌다.


이후 구두로 제시한 조건은 내 연차에선 받기 힘든 꽤나 높은 수준의 연봉이었다.

최근 다른 곳들과 진행했던 인터뷰를 통해 나의 사회적 몸값 또한 대충 유추할 수 있었으니 그 대비감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분명 긴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좋은 조건". 단지 그 한 마디였는데,

그동안 해왔던 일이 하기 싫다며 이전 회사를 맨 몸으로 뛰쳐나온 데에다 심지어 이 기업의 채용 과정은 그 어느 곳의 경험보다 별로였다고 생각해 놓고, 그저 돈을 많이 주겠다는 그 한 마디에, 이전에 내렸던 결론들이 무색하게 나는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마냥 무참히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좋아하던 음악도, 영화도, 독서도, 운동도 - 그 어떤 것도 하지도 않은 채 무력하게 시간을 보냈다.


현재에 대한 뚜렷한 대안책이 생기니, 만족스럽던 나의 현재가 갑자기 너무 두렵고 싫어졌다.

지금의 나는, 뚜렷한 미래 없이 일은 하지 않은 채 가난하게 방황하는 삶처럼 느껴졌고,

회사를 다니는 나는, 적당한 사회적 지위와 책임을 갖고 지금보다는 풍요로운 삶을 살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현실적인 고민이랍시고 이런 우울에 빠져있는 내가,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살겠다고 다짐해 놓고 또 흔들리는 내가 실망스러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울감만 깊어져갔다.


그깟 돈이 뭐라고.

그거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때, 문득 내가 읽은 책과 인상 깊은 구절을 종종 기록해 놓는 독서 어플이 생각났다. 퇴사 이후로 진로 탐색을 위한 여러 분야의 독서를 시도했는데, 두어 달 전쯤엔 전 회사 직장 동료분이 추천하며 빌려준 비트윈잡스에 놓인 사람들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었다.

"선주님, 나는 이거 읽다 울었어." 책을 건네받으며 들었던 말이 무색하게 나 또한 이 책을 읽다가 울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수많은 책의 기록들 중에서도 이 책의 노트를 가장 먼저 찾으려 했다. 아마 이 복잡한 마음을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쉽게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단순히 경제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까지 포함된 말이다.
내 상황이 딱 그랬다. 결국 가난한 결정을 했다



아, 머리를 짚었다.

그래, 사실 금전적 빈곤함보다 마음의 빈곤함이 더 괴롭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버티다 못해 나왔던 이유도 결국 월급이나 돈 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나왔던 것이었는데, 난 그저 아직 나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또다시 가난한 결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미 알고 있는 오답을 또다시 선택하려 하다니.


휴대폰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 몇 가지 노트를 더 읽은 뒤 몸을 일으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느 때와 같이 러닝을 갔다.

며칠 째 지독하게 고민했던 순간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마냥, 그저 선선한 저녁 바람을 아무 생각 없이 맞는 이 순간을 즐기기 위했던 사람처럼.


퇴사하면 큰일 날 줄 알았지


며칠 뒤 다시금 연락이 온 담당자에게 더 이상의 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내가 길었던 인터뷰 과정도 잘 마쳤고, 최종 조건 또한 나쁘지 않았지만 제안을 고사한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자초지종 현재 나의 상황을 설명하며 최대한 정중하게 마지막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노트북을 열어 그동안 "적극적인 구직 중"이었던 나의 상태를 닫아두었다. 이 마지못한 척 열어뒀던 나의 구직 상태가, 오히려 나의 확신과 안정감을 훼손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작은 것에 흔들린다는 것부터 굳은 확신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지만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도 있듯이 이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방향성을 좀 더 견고히 해나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대략 2주가 지난 지금, 나는 이 일을 기폭제로 이전까지 고민하던 일들을 좀 더 구체화하여 나의 미래를 촘촘히 계획해나가고 있다.

10월부터는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새로운 공부도, 새로운 만남도, 새로운 투자도, 두려워하지 말고 진심을 다해서 다시 한번 딥다이브해보며 지갑보다 마음이 풍요로운 2025 백수 생활이 되기 위해 남은 하반기 동안은 부단히 노력할 예정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러려고 퇴사한 건 맞으니까. 하나하나 경험해 보면 좀 더 뚜렷한 미래를 그려갈 수 있겠지.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다시 한번 전력질주해보려 한다.


달팽이 '나름 전력질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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