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배 위에 갇힌 여자애들의 서열
초대해줘서 고마워! 나는 솔직히 이 정도로 부자일 줄 몰랐어. 네가 집이 배라고 했지만, 누가 그걸 믿었겠어? 갑판에서 찍은 네 셀카는 엄청 부자연스러웠다고. 세상에, 실물로 보니 훨씬 큰데 이걸 교실 바닥처럼 노랗고, 칙칙하게 찍은 거야? 다들 돌아가면서 요즈음은 우리 같은 애들한테 요트도 렌트해주는 모양이라고 말했지. 아니면 네 부모님이 요트 관련 일을 하시던가. 아마 파는 건 아니고 관리나 해주는… 아냐, 절대 네 뒷담방을 만들었던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없던 방이야.
이렇게 넓은데 고용인은 별로 없네? 하긴 그 사람들 월급 주는데도 돈이 좀 나가겠다. 기계가 해준다고? 너 정말 로봇세를 내야겠구나? 그래도 관심은 좀 가. 나 로봇 구경시켜줘. 그리고 사진 찍어도 돼? 계정에도 올려도 될까? 내 친한 친구들만 보게 할게. 안 된다고? 너도 배 사진 많이 올렸잖아. 애들이 질투할 거라고? …참. 너 은근히 나 챙겨준다니까? 그래서 나도 너 은근 아끼고.
배 이름이 뭐야? ZOE. 잠깐, 네 아이디랑도 똑같네. 그게 너 본명이라고? 너 학교에서는 혼혈이라서 리자베타라고 그랬잖아. 그러면 풍양 조씨야? 몰라? 넌 아직도 완전 외국 애 같다니까. 하긴, 이렇게 큰 배를 타고 전 세계를 쏘다니면 국적은 중요하지 않을 거 같다. 우와, 나 로봇이 내린 커피는 자판기 말고 처음 마셔봐. 프로그래밍하면 찻잔도 옮길 수 있구나. 맨날 종이컵만 뽑아서 만드는 건 줄 알았는데. 우리 동네에도 이제 생겼거든! 로봇 카페. 그래도 종이컵만 쓰니까 결국 자판기지. 안 그래? 애들은 나 아직도 강남에서 산다고 알고 있더라. 우리 참 아이러니하지 않니? 난 사실 다큐에 나올 법한 거지인데 부자라고 소문났고, 넌 티타늄다이아스푼 레이디인데 학교도 졸업 못 했다고 소문났잖아. 사실 안 간 건데 말이지. 나만 네 정체를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얘 커피 말고 다른 건 못 만들어?
음, 이렇게 맛있는 레토르트 식품은 처음 먹어봐. 그래도 껍질 벗기고 데워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싸구려 핫바 같다. 하지만 캐비어 푸딩은 데울 필요가 없겠지! 나 한 세 개만 건네주라. 생각보다 달콤하지는 않네? 안 되겠다. 다음에는 셰프도 꼭 태우자. 응? 풍경은 멋있는데 로봇들이 바보라서 생각보다 놀 게 없어. 우리 사진이나 찍을래? 안 올리고 우리끼리 추억하는 용도로. 나 너랑 찍으려고 예쁜 수영복도 한 쌍 챙겨왔단 말이야. 우리 서로 배색이야. 완전 우정템 같지?
생각보다 색이 붕 뜨네. 뭘 좀 꾸미면 어울리려나? 여기 꽃 써도 되지? 엄청 쨍해서 조화인 줄 알았는데 생화네. 가만히 있어봐. 꽂아줄게. 잘 어울린다. 넌 역시 귀여운 상이야. 우리 같이 있으면 은근히 균형이 맞는다니까? 난 사실 내 친구들이랑 다니는 것보다 가끔 너랑 몰래 둘이서 밥 먹고 학원 째는 게 더 재밌었던 거 같아. 그러고 보니 너 특이하다. 학교는 자퇴했는데 왜 학원은 그렇게 꼬박꼬박 나왔어? 그것도 내신 대비반을. 나라면 그냥 이 배도 있겠다 무서울 게 없을 텐데! 아마 중학생 때부터 학교 때려치웠을 걸? 뭐야, 학원에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고? 자세히 말해봐. 왜 말해주지 않았어? 키는 컸어? 내가 아는 애야? 서운해. 나한테 숨기는 게 있고 말이야. 걔는 끝까지 네가 좋아하는지 몰랐다는 거지? 알았을 수도 있다고… 에이, 그런 건 네 희망 사항 아니야?
수능도 끝났으니까 나 완전 널널해. 네가 불러도 빼먹지 않고 오겠다 이 말이야. 그리고 졸업도 할 건데, 이제 너랑 노는 거 눈치 볼 필요도 없겠다. 정말이야. 나 너랑 어울리는 게 더 좋았어. 걔네는 시끄럽고, 남자만 밝히고…. 그러고 보니 너도 좋아하는 남자애 있다며! 실망이야. 응? 남자애가 아니라고? 너 그러면 선생님을…? 학원 열심히 나온 이유를 알겠네. 아깝다. 선생님들 좋아하는 애들이 공부 잘하잖아. 너도 바보 같은 편은 아니었던 거 같고. 부모님은 너한테 공부로 뭐라 하셨어? 자퇴도 신경 안 쓴 거 보면 역시 별 관심 없으셨으려나? …부모님이 안 계셔? 우리 이 얘기 그만하자. 내가 로봇한테 다른 것 좀 달라고 할게.
기다리고 있었어? 블루랑 핑크 레몬에이드 만들어달라고 했어. 우리 수영복 색깔! 짠. 참, 부엌 구경했는데 칵테일 재료 있더라. 우리 에이드에 조금만 타면 안 될까? 우리 곧 성인이잖아. 자꾸 쩨쩨하게 굴래? 삼촌이 좋아하는 술이라고? 나중에 새 거 사서 바꿔놓으면 되지. 사러 가는 게 부끄러우면 내가 사올게. 아니다, 같이 가자!
잘못 섞었어. 쓰기만 한데 버려야겠다. 아니다, 레몬 좀 넣으면 되려나? 너 지금 표정 되게 웃겨. 취했구나! 아 덥다. 이거 스쿠버 다이빙 장비야? 멋있다. 나 차볼래. 나 사진 찍어주라. 물에 들어가서 찍어야 더 살려나? 네가 평소에 찍은 것처럼 이상하게 나왔어. 너 사진을 못 찍는 건 아닌데 좀 묘해. 이게 다 반들거리는 모조품 같아. 기분 별로야. 나 물에 들어가도 돼? 장비도 입었겠다 빠져 죽지는 않을 거 같아. 잠깐 정박해놓고 놀면 안 돼? 영화에서 보니까 닻 내리던데. 싫어. 선내 수영장은 이제 별로야. 미끄럼틀도 없잖아.
꼬집을 필요는 없었잖아. 이거 손톱자국 어떻게 할 거야? 나 아파 죽겠어. 짜증나. 배 돌려. 우리 집으로 갈래. 이거 운전해서 한강까지 못 가나? 하긴, 다리에 걸려서 둘 다 박살나겠다.
잠깐, 그거 미끄럼틀이네? 버튼 누르면 설치되는 거야? 별 게 다 있어. 하긴 이렇게나 큰데 없으면 오히려 허전했겠다. 줄도 안 서도 되고, 재밌어. 어릴 때 집 앞에 있던 곳보다 훨씬 낫다. 거기는 모기도 너무 많고 애들이 물 더럽혀서 들어가기 싫었는데. 한동안 눈병이랑 두드러기 때문에 고생했잖아. 넌 그런 적 없으려나? 바다가 더 더럽다고? 음… 됐어. 그렇게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아도 돼.
이제 졸리다. 침실은 어디야? 당연히 샤워하고 잘 거니까 걱정 말고. 안 닦아도 된다고? 너 진짜 이상해. 나 더는 헛소리 들어줄 기운 없으니까 아침에 보자. 잘 자. 꼭 해줄 말이 있다고? 톡으로 남겨줘. 아침에 읽어볼게.
*
나 이상한 꿈 꿨다? 내가 선장이었어. 이 배가 내 소유였던 거지. 네가 나한테 바친 건지 우리가 결혼이라도 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법적으로도 이 배는 완벽하게 내 명의라서 나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갔어. 한참 동안. 그러다가 네 의사를 안 들은 게 생각나서 좀 미안한 거야. 그래서 너한테 이제 어디를 갈 건지 물어봤어. 그랬더니 네가 이렇게 말하더라? ‘어디든 상관없어. 네가 옆에 있으면 돼.’ 진짜, 내가 지어낸 게 아니라! 내가 널 몰래 좋아해서 털어놓는 게 아니라! 정말 꿈속에서 네가 그랬어. 기분이 엄청 이상했는데 싫지만은 않더라고. 웃기지? 어쨌든 말하고 싶어서 아침 일찍부터 찾았는데 넌 어디 간 거야? 적어도 사용법이라도 알려주고 가야지! 지금 나한테 벌이라도 주겠다는 거니? 계정에 사진 몇 장 올렸다고? 내가 얌전히 있을 거 같아? 나도 이제부터 네가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서 할 거야. 네 삼촌이 아끼는 술들 멋대로 바다에 뿌릴 거야. 미끄럼틀 고장 낼 거야. 라이브 켜서 애들한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보여줄 거야. 이 미친 바닷가! 어떻게 휴대전화가 안 터지지? 잠깐. 저거 네가 입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스쿠버 다이빙 장비네. 난 튼튼하니까, 이대로 육지까지 헤엄쳐서 나가줄게. 넌 재수 없는 이 배나 감옥에서 평생 썩기나 해.
수영하는 법이 뭐였더라? 아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돼. 난 이 좆같은 배를 버릴 거야. 그리고 너와의 비밀 관계도! 물살을 따라가면 되겠지? 물살을… 왜 물이 안 움직이지? 배가 움직인 적은 있었나? 그러고 보니 나, 멀미 끔찍하게 심한 편인데. 잠깐, 나 아직 숫자 다 못 셌어. 그리고 지금 떨어지려던 게 아니었어. 자세도 엉망이었으니 머리부터 아작날 거라고!
“엄마, 앤이 또 크루즈선 디오라마에 머리 찧었어.”
“얘도 참. 그런 건 금방 죽는다니까. 소인한테 웃음가스도 그만 틀어놔. 네 방에서 냄새가 심하다.”
“앤이가 내 모형한테 말 걸어. 소리 확대경 같은 건 없나?”
“보청기겠지.”
“하여튼, 저번에 욕하는 소리는 들렸는데 이번에는 뭐라 말하는 걸까?”
“네 시나리오가 구리다고 하는 게 아니니? 그런 식으로 날 갖고 놀다니 잘도 어울려주겠다! 이 무시무시한 소인 녀석, 네 방이나 감옥에서 썩어 죽어라!”
“징그러워. 조금만 더 가지고 놀다 버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