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마이크로하게 혐오?하는 남자
여자들의 미각을 증오한다.
그네들은 피차 공복으로 출근했을 텐데 오전에는 죄 카페인만 때려붓다가, 점심에는 새빨간 메인디쉬를 먹어치우고, 후식이랍시고 혈당 강스파이크가 그대로 내려꽂히는 후식을 먹었다. 그뿐인가? 일 끝나고서는 기념이랍시고 고기, 술. 그러고는 다음의 간헐적 폭식을 위해 절식을 감행했다. 내가 알기로는, SNS에서는 여자들에게 비건이니 다이어트니 샐러드가 유행이라는데 적어도 이 회사에서는 그런 일은 향후 100 년… 아니, 패러다임이 바뀌고 나서야 가능해 보였다. 당장 체리님이 불닭볶음면 묻힌 복사용지를 건네준 게 증거였다. 그는 호쾌하게 새끼손가락으로 치실질까지 했다. 제발, 사후 처리를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살인은 하지 마세요. 아니면 제가 저지르게 만들지도 마세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행위를 그가 유심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뭔가 알아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지 딴에는 친절하게 건네는 제안.
“코코넛님, 점심에 마라탕 먹으러 갈까요?” “체리님 천재야, 내가 마라탕 먹고 싶었는 줄 어떻게 알고?” 샤인머스켓님이 외쳤다. 여자들의 환호성이 요란했다. 단 6명으로 이루어진 디자인 회사. 거기서 청일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맥없는 동조뿐이었다. 체리님은 말끔한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었다. 나를 향해, 잔인하게도! “내 앞에서 코코넛님이 아침부터 시끄럽게 침을 삼켰거든요. 밥 사달라는 거지.”
머리가 짧아서 코코넛, 그러니까 나 김욱은 안동 김씨의 후손이며 6대 독자다. 나를 철저히 오해하는 5명의 동료들에게는 유감이지만, 나는 입대 전까지 김치를 물에 씻어먹었다. 매운 것도 매운 건데, 집에서 저염식만 먹였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집안의 여자 어른들이 싸주신 도시락만 먹었다. 원체 몸이 약해 과보호를 받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온실이 그저 좋았고, 빠져나갈 생각은 없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비슷한 입맛을 가진 여자를 만나려던 계획이었다. 물론 결국은 다 군대가 문제였다.
때리는 것도, ‘하다못해’ 욕도 안 되자 선임들은 내게 고추냉이를 몰아주는 장난을 쳤다. 팔각모의 남자들은 원래 좀 짓궂은 법이니까. 하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부대에 정말 난사를 날리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저 새끼들 다 죽여버릴 거라고 부은 혀로 펄펄 날뛰던 나. 그걸 말린 건 나의 구세주, 박승엽 상병님이었다. 그가 사주신 바나나 우유를 다섯 개째 들이붓고 있을 때였다. 주인께서 말씀하셨다. “졸업하고 왔다고 했지? 어디 일할 곳은 있냐?” “예혜, 엾흡니댜.” 그가 낄낄거리며 바나나 우유 하나를 더 까주었다. “나한테 메롱은 하지 마라.”
녹빛의 나의 형님. 피부가 흙 같아서 군복이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상남자. 그러나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유일한 지성인. 그가 내게 권한 길은 고춧가루와, 마라소스와, 캡사이신 깃발을 꽂은 여초 회사였을 줄은. 지적이긴 개뿔 지적질을 더 잘하는 이채, 즉 체리 대표가 박승엽님의 여자친구라는 것은 아직도 못 믿을 일이었다. 그것도 결혼 얘기까지 오가는 사이랬다. MZ한 회사가 되고 싶어서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 곳. 그러나 아무도 이채의 메뉴 선정에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는 곳. 여기는 미(M)친 지(Z)랄의 최전선이었다. 그러나 고일대로 고인 이곳에서 예민하게 분개하는 이는 나뿐인 것을…. 이채가 내게 따가운 탄산 음료를 들이밀었다. 오직 승엽님을 위해 인고하리라. 내가 퉁퉁 부은 혀로 캔 입구를 핥았을 즈음이었다.
“코코넛씨, 나 승엽씨랑 헤어졌다? 어어, 다들 놀라지 말고. 난 괜찮으니까. 그런데 코코넛씨, 메롱 하지 마. 지금 음료수 다 뱉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