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냉장고 안에서

14년간 정든 냉장고를 보내며

by 김선

비거덕, 비거덕.

“야, 좀 떨어져.”

“찐득찐득한 이건 또 뭐야?”

냉장고 안에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반찬통들이 아우성이에요.

며칠 전부터 냉장고가 끙끙 신음만 내며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냉장고가 멈춰 버린 거예요.

“얘들아, 미안해. 이제 더는 안 되겠어.”

마지막 숨을 뱉어내듯, 윙윙 소리 내던 냉장고는 공허하게 멈춰버렸어요.

“아이참, 그렇다고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그러게 말이야. 안 그래도 이 집 꼬마가 하도 냉장고 문을 여닫는 바람에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맛이 돼 버려서 짜증 나 죽겠는데.”

지난주 아줌마가 새콤달콤하게 담가놨던 열무김치가 한 숨을 내쉬며 말했어요.

“그래도 열무김치 넌, 쉬더라도 국수랑 말아서 먹을 수나 있지. 난 오늘이 지나면 버려지던가 아니면 사람들이 먹고 나서 배탈 났다고 내 탓만 할 거라고. 모두 냉장고 너 때문이야.”

이틀 전 아저씨가 두부가게에서 사 왔던 콩국이 투덜댔어요.

“그래도 너흰 맛있는 음식으로 변신이라도 해봤지. 난 이게 뭐야? 내 영롱하던 노란 빛깔이 누렇게 변해버렸어.”

“나도 나도. 아줌마가 다이어트다 뭐다 해서 사놓곤 일주일째 날 방치하고 있잖아. 너희들 노랗게 꽃 핀 브로콜리 봤어?”

며칠째 야채칸 구석에서 누렇게 물들어버린 파프리카와 브로콜리가 신세한탄을 했어요.

“너희들은 헉, 헉, 얘기할, 힘이라도 있지. 난 이제 힘들 것 같아.”

“어머, 찐득찐득한 정체가 너였니?”

냉장고에 있으면 안 되는 토마토가 곰팡이 폭격을 맞아 짓물러 터져 있었어요.

“아줌마가 시원한 토마토가 먹고 싶다고 넣더니, 헉, 헉, 일주일째 깜깜무소식이야.”

“정말, 이 집 사람들은 게으르고 너희들한테선 냄새나고, 이 냉장고는 십 년도 넘어 보이는 구닥다리고……. 짜증을 낼 수 있는 건 나뿐인 거 같은데, 안 그래?”

이웃집에서 지난주 선물로 들어온 옥수수가 수염을 털며 입을 삐죽였어요.

“야, 옥수수! 너는 냄새 안 날 거 같아? 너도 들어온 지 일주일쯤 된 것 같은데, 보아하니 수분도 없어지는 것 같고, 넌 냄새가 문제가 아니라 쭉쭉 말라가겠는걸, 하하하.”

“쉬어빠지고 말라빠진 옥수수라, 히히히.”

듣고 있던 냉장고 속 친구들의 비웃음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앵앵 울렸어요.

그때였어요.

“쯧, 쯧.”

누군가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어요.

“다들 어쩜 그리 못됐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은 못 할망정, 투정이나 하고 못된 말로 공격이나 하다니! 그동안 우리가 누구 덕분에 이렇게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다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맨 아래칸에 있는 고추장 할아버지였어요. 말을 잘하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고추장 할아버지가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정 원망하려거든 게으른 이 집 사람들을 탓해야지. 자그마치 14년이야. 그동안 묵묵히 이곳을 드나드는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 준 건 바로 이 냉장고였어. 우리가 이렇게 형태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게 모두 냉장고 덕분이었다고.”

다들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어요. 입도 뻥긋하지 못했죠.

옥수수만 빼고요.

“그건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 냉장고가 십 년이 넘었다는 건 오히려 새 냉장고로 바꿔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게다가 기능도 다 한 냉장고라면 어차피 버려질 건데 공치사는 해서 뭐해요?”

옥수수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툴툴거렸어요.

“냉장고야, 철없는 옥수수 말은 귀담아듣지 말고 편히 가렴. 그동안 수고 많았다. 푹푹 찌는 한 여름에는 뜨거운 몸 달구며 우리를 시원하게 지켜주고, 펑펑 눈 오는 겨울에도 얼지 않도록 보살펴 준 거 이제야 인사하는구나. 고마운 마음은 늘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되고서야 비로소 표현을 하는구나. 우리를 용서하렴.”

“으흠, 나도 정말, 고마웠어!”

“응, 나도 나도.”

“잘 가. 냉장고야!”


이틀 뒤였어요.

“안녕!”

익숙한 목소리였어요. 냉장고였어요. 짠순이 아줌마가 고장 난 냉장고를 버리지 않고 수리 기사 아저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터만 새로 바꿨어요. 냉장고가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난 거예요.

냉장고 옆에는 큰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놓여 있었죠.

맨 위에 노란 옥수수수염이 삐져나온 채로요.




14년간 함께 했던 냉장고를 어제 교체했습니다.

동화와는 달리, 10년쯤 됐을 때 모터를 교체했고 이번에 또 이상이 생겨 새 냉장고로 교체했어요.

제 결혼생활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기에 더 애착이 가는 냉장고였어요.

기존에 쓰던 냉장고는 가져가서 버린다는 기사님 말씀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더라고요.

길상효 동화작가님의 [깊은 밤 필통안에서]라는 동화책을 패러디해서 냉장고에 바치는 동화를 써봤습니다.

정리정돈 잘 못하고 게으른 주인을 만나 고생 많았다. 정말 수고했어. 내 하얀 윙윙이!

(그러고보니 이전 냉장고는 사진도 못 찍었네요. 새 냉장고 사진 붙여다놓고 이런 글 올리는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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