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지락 사랑
내가 부모가 되면 사랑의 화수분이 되어 아이들에게 사랑만 퍼부어줄 줄 알았다.
임신했을 때 수없이 다짐해왔던 것이고
내가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난생처음 출산을 한 소감은 처절하다였다.
이건 분명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서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다.
그 힘든 출산을 거쳐 더 힘든 육아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는데 그곳엔 생존본능만이 가득하다.
한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한 어미의 처절한 노력은 제3자가 보기엔 완벽한 사랑이지만
어미 그 본인은 그냥 정신없는 전쟁터 같은 육아의 세계일 뿐이다.
나는 엄마야. 우리애기 이쁘고 사랑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지? 현타가 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가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잠들기 시작하면 그제야 사랑이 보인다.
'어머 예뻐..'
그렇게 엄마의 자유와 멘탈 체력을 갈아 넣은 육아에 시간이라는 MSG를 첨가시키면
점차 힘듦이 익숙해지면서 숨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다.
이제 이 아이도 엄마를 너무 잘 알아보고 껌딱지마냥 딱 붙어있다.
말은 못 하니 눈으로 대충 의사소통이 되고, 아이가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느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내 새끼.
아이는 엄마가 안 보이면 울었고, 엄마와 한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으며, 늘 엄마 행동의 모든 것을 궁금해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본능일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를 붙잡아야 아이들은 살아갈 수 있으니까 기가 막힌 본능에 충실할 뿐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일방적인 사랑을 주는 아가페의 현신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독박 육아에 지쳐 쓰러져 잠이라도 든 날이면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색종이같이 작은 자기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엄마가 저에게 해주듯.
또 유난히 힘든 그날 그 힘듦이 버거워 구석에 울고 있는 날엔
뽁뽁 기어와 나에게 안긴다. 그 아기의 체온이 왜 그리 위안이 되는지..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그렇게 그림편지를 써오고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면 그렇게 편지를 써온다.
내 생에 러브레터를 그렇게 많이 받은 적이 없다.
하루에 기본 열 통 이상이었으니까.
어린이집을 다녀와서, 유치원을 다녀와서, 학교를 다녀와서
엄마를 하루에 몇 번을 불러제끼는지 모른다. 30초에 한번씩 엄마 소리를 듣는 것 같은데..
할 말이 너무 많다.
외동으로 자란 나로서 나는, 나를 그렇게 많이 찾아주는 경우가 처음이라 아직도 정신이 혼미할 때가 많다.
그런데 그 모든 행동이 아이의 마음에서 기인한다.
사실 그 아이의 사랑은 날 때부터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고 울음만이 표현의 길이었던 그 아이가
깜빡 잠든 엄마의 손가락 하나를 잡고 잠이 들었던 그날도 나는 모르는 사랑을 그 아이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아이에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동아줄이요, 구원의 줄이요, 우주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내가 내 힘든 것만 보였지 아이의 사랑과 어려움을 볼 생각도 못했을 뿐.
당연히 엄마니까 무한하고 깊은 사랑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되려 그 사랑은 내가 아이들에게서 받고 있다.
누가 나를 그냥 엄마라서 무작정 좋아해 주고 편들어주겠어.
아직 자라지 않은 내 마음이 아이들에게 부족함을 안겨주었을 텐데
아이들은 그마저도 괜찮다고 말하며 나를 꼬옥 안아준다.
그냥, 엄마라는 이유로 괜찮다고 해준다.
그래서 오늘도 느낀다.
우리는 함께 자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