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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Mar 01. 2024

오래된 책들과 이별하는 일

오늘 난 서가를 가득 채웠던 책들을 버렸다. 책이 너무 많아 이제 더 이상 둘 곳도 없을 뿐더러, 읽지도 않는 책을 장식처럼 꽂아두는 것도 미련이다 싶어 큰맘을 먹은 것이다. 물론 3,4년에 한 번씩 책 정리를 해왔었다. 주기적인 정리해고에도 살아남은 책들을 다시 하나하나 심판해 “You’re fired!”라고 외치는 게 참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 영혼의 도서관


책을 버렸다. 400여 권쯤. 아프다. 내 삶의 어느 일부를 도려낸 것 같다. 책은 다른 물건들과 다르다. 책에는 책 주인의 취향과 영혼이 배어 있다. 삶의 이력과 고민의 흔적이 이정표처럼 나열되어 있는 내 영혼의 도서관. 내가 가진 모든 책에는 내 지문과 숨결, 시간과 스토리가 들어 있다. 책은 친구다. 학문의 즐거움을 일깨워주고, 비루한 내 영혼에 교양을 이식해 준 친구. 무엇보다 나의 고독을 이해하고 오래도록 내 곁에 있어준 친구.      


버릴 책을 추려낸 후 하나씩 펼쳐보았다. , 형광펜으로 그은 밑줄들, 작은 글씨로 쓴 별표(★)와 물음표(?), 포스트잇에 써붙인 그때그때의 생각들. 새로 산 책을 펼쳤을 때의 기쁨이 되살아난다. 그 책 첫 페이지에 단정하게 이름과 날짜를 쓰며 뿌듯해 하던 젊은 나. 원대한 미래를 꿈꾸며 희희낙락하던 과거의 내 시간들이 고스란히 차오른다.       


“나 죽으면 꼭 이 전집과 같이 묻어줘.”


사고 싶었던 책을 사면 온 세상을 가진 듯 그렇게 행복했었다. 대학원 다니던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서 원하던 전집을 샀을 때의 희열. “나 죽으면 꼭 이 전집과 같이 묻어줘.” 지켜지지 않을 유언까지 해대며 책을 끌어안았었다. 내 무덤에 순장하려던 그 전집은, 표지가 날긋날긋해진 채, 지금 붉은 나일론 끈에 묶여 현관 앞에 누워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때 애정했으나 쓸모를 잊은 지 오래된 과거의 유물들. 추억이 유일한 쓸모가 된 책들. 버린다. 버려야 한다. 서가를 비워야 새 책이 들어설 수 있다. 미련을 버리고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떠난 연인을 잊어야 새 인연을 맞이할 수 있고, 마음을 비워야 번민에서 벗어난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그래,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오늘 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한때 내 전부였던 책들과 이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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