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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Jul 05. 2024

어른다운 어른

영화 《인턴》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노인이 죽으면 그 마을에 작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 시절엔 그랬을 것이다. 기록된 문서가 없으니,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와 조언은 경험 많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자료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래서인가, 이 시대 노인들은 더 이상 지혜의 샘으로 추앙받지 않는다. 경험많은 노인들이 전해 주던 정보는 이제 온라인 상에서 훨씬 정확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즉각 제공받을 수 있다. 게다가 몇몇 노인들은 낡은 경험을 앞세워 아직도 당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착각하며 끝없이 잔소리를 해댄다. 그러니 이제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포털이, AI, 챗GPT가 알지 못하는,  수 없는 세계도 있는 법이다. 인간의 경험이 그렇고, 인간의 마음이 그렇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하는 건 인간만의 특권이다. 지식정보 사회일수록 수많은 시간을 견디며 얻어낸 인간의, ‘어른’의 지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인턴》(2015)은 낸시 마이어스가 감독하고, 로버트 드 니로(벨 역)와 앤 해서웨이(줄스 역)가 출연한 미국 영화다. 로버트 드 니로가 1943년생이니 영화 촬영할 때쯤은 극중 나이와 비슷했을 테고, 그래서 훨씬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젊은 시절의 그를 기억한다. 특유의 강렬하고 서늘한 마스크 때문에 영화볼 때마다 가슴 설렜었는데, 이제 칠순이 넘은 그는 오래 푹 끓여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진 감자처럼 부드러워졌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인턴》을 리메이크한다는 기사가 났고, 로버트 드 니로 역에 배우 최민식이 물망에 올랐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벨은 3년 전 아내가 떠났고 지금은 은퇴한 상태다. 42년이나 다닌 직장을 그만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 역시 퇴직을 5년 앞두고 있다. 바빠서 정신없을 때마다 5년만 버티자, 되새기지만 막상 일을 놓고 나면 그 길고긴 24시간을, 봄여름가을겨울을 어떻게 무엇을 하며 보내게 될까. 막연하던 내 노후가 이 영화로 인해 갑자기 줌인된 느낌이다.       


처음에 무단결근하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모아둔 마일리지를 사용해서 전세계를 돌았어요. 문제는 어딜 가든 집에 돌아오면 구태여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날 괴롭혔어요.

남는 시간은 어떻게 보내냐고요?

온갖 걸 다하죠. 골프, 책, 영화, 카드놀이. 요가도 해봤고 요리도 배웠어요. 화초도 가꿔보고, 중국어도 배워봤어요. 다시 말해 정말 안해본 게 없어요.

그리고 장례식이 있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요.      


우린 항상 그렇게 말한다. 집만 사면, 대출금만 갚으면, 아이들만 다 키워 놓으면, 퇴직하면……. 지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은 그렇게 유예된다. 사람들은, 젊었을 적 그렇게 고생하더니 이제 살만하니까 아프다, 라는 말을 한다. 살만해지니 아픈 게 아니라, 사실 살만해질 때까지 아픈 것을 참아온 걸 거다. 병원가는 시간조차 사치처럼 자꾸 후순위로 밀리는 바쁜 일상. 이런 우리가 퇴직하면 그동안 써왔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행복하게 살아갈까. 아니면 자신의 쓸모없음과 일상의 무료함에 치를 떨며 버텨내게 될까.      


벤은 슈퍼를 다녀오다 우연히 ‘고령인턴채용’ 공고를 보게 되고, 준비 끝에 합격한다. 공교롭게도 그 회사는 벤이 촐퇴근하바로 건물에 위치해 있. 전화번호부를 만들던 회사였는데 시대의 흐름에 밀려 사라지고 이제는 그 자리에 온라인쇼핑몰이 들어섰다.


회사의 CEO는 30대 중반의 여성 줄스. 창업한 지 1년 반 만에 갑자기 회사가 커지자, 먹고자는 것은 물론 운동조차 할 시간 없이 나노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워커홀릭이다. 그러나 그녀는 잘해 내야 한다는 강박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게다가 아이와 남편에게 제대로 된 엄마와 아내 노릇을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갖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처음에 벤의 나이가 너무 많아 탐탁치 않아하던 줄스는 벤의 포용력과 지혜, 배려 덕에 불안과 상처를 잠재우고 위로받는다. 결국 줄스는 그를 인턴이자 ‘절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는 내용. 등장인물들의 꼬이고 엉킨 갈등들이 벤의 지혜 덕에 하나씩 해결되며 끝난다.  


벤은 젊은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그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고, 줄스의 가정사까지 살뜰히 챙기는 완벽한 ‘어른’으로 등장한다. 듣고 본 것을 옮기지 않고, 타인의 삶에 먼저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그 이야기를 경청한 뒤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이런 벤의 태도야말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나무그늘이다. 누구나 잠시 쉬며 땀을 식히고 숨을 고를 수 있는,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 커다란 느티나무. 이런 어른이라면 가히 '작은 도서관'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영화는 장르가 ‘코미디’로 분류된 만큼 해피엔딩이다. 따뜻하고 착한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 내가 과연 큰 그늘을 펼칠 수 있는, 제대로 된 ‘어른’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어른이라면 누군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가 겪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따듯한 조언과 응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이를 먹은 만큼, 많은 경험을 한 만큼,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고집과 독선을 버리고 유연하게, 너그럽게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아직도 내 앞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나는 커다란 나무그늘은커녕 젊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인생은 길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있을까. 먼 길 가는데 잠시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쉬면서 차가운 물도 한잔 마시고, 하늘이 맑은지 흐린지 한번 올려다보기도 하고, 가끔씩 지인들의 안부도 묻고, 가족의 안녕도 챙겨야 하지 않을까. 요즘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던 내가 갑자기 한심하고 불쌍해 보인다.


뭣이 중한디! 말로는, 머리로는 지금, 여기를 외치지만, 난 여전히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매여 좀처럼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언제까지 이럴 건가. 급한 일 마무리할 때까지? 퇴직할 때까지? 놉! 이제 그놈의 퇴직하면, 퇴직하면, 이란 노래는 그만부르자. 지금 당장, 잠시라도 노트북을 덮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     




* 사진 출처 : Daum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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