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며칠 전 친구들과 함께 한 친구의 집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저녁 때쯤이라 바람이 솔솔 불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블루투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노래들, 시원한 맥주, 시시껄렁한 얘기들. 캠핑 의자에서 본 오른쪽 하늘엔 붉은 노을이 파스텔톤으로 넓게 퍼지고 있었다.
넓고 넓은 지구에서 나는 어쩌다 이 나라에서 태어났고,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어쩌다 이들을 만나 이렇게 친구가 되었을까, 생각하니 이것도 정말 ‘인연’이다 싶었다. 난 그 시공간이 너무 좋아 마치 사진 찍듯 찰칵, 그 장면을 내 마음에 저장해 두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2023)은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계 캐나다 국적의 셀린 송이 감독하고, 그레타 리와 유태오가 출연한 미국영화다. 미국 비평가협회 신인감독상, 뉴욕 비평가협회 데뷔작품상, 전미비평가협회 작품상 외 많은 상을 받았고, 제 81회 골든 글로브 작품상 포함 5개 부문과 제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는 ‘Past Lives’, 말뜻 그대로 ‘전생’과 이번 생의 ‘인연’에 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아마 감독이 한국계가 아니었다면 ‘전생’이나 ‘인연’이란 단어를 이렇게 제목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 우리가 즐겨 쓰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4년 전 초등학생 시절의 단짝 나영과 해성은 나영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가며 헤어진다. 12년 후, 나영은 또한번의 이민을 한 후 뉴욕에서 ‘노라’라는 이름의 극작가로 활동 중이고, 해성은 군복무를 마친 후 대학을 다니고 있다. 나영은 SNS로 자신을 찾는 해성을 발견하고, 둘은 미국과 한국에서 영상통화를 주고받으며 온라인으로 재회한다.
나영이 해성과 소통하는 이유는 비단 ‘해성’이라는 특정 인물, 어린시절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닌 듯하다. 자신이 두고 온 고향,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진하지 않았을까. 나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국어로 소통하는 곳, 익숙한 골목들을 오가며 벅찬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곳, 아무도 자신을 이방인 취급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해성과 연락하면 할수록 나영은 여기 삶에 충실하지 않은 채 자꾸 서울행 티켓을 알아보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결국 해성과의 연락을 끊는다. 나영은 두 번이나 이민하며 낯선 타국을 떠도는 자신이 한낱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에 집중하지 않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거다.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를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past lives’는 중의적 의미로 쓰인 것 같다. 하나는 그야말로 ‘전생’. 나영과 해성이 전생의 인연으로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다. 다른 하나는 나영이 이민오기 전, 한국에서 지낸 ‘과거의 삶’이다. 나영에게 과거는 곧 서울이고, 서울은 해성으로 표상된다. 나중에 뉴욕에서 해성을 만난 소감을 나영은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기억 속에 있던 아이고, 컴퓨터 화면에 이미지로만 있었는데, 이젠 실물이잖아. 강렬한 감정이긴 한데 끌리는 건 아니야. 많이 보고 싶었던 거지. 서울이 그리웠나봐.
나영은 더이상 나영이 아니다. 이젠 '노라'다. 노라는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기 위해 예술인 레지던스를 찾아가고, 거기에서 만난 유대계 작가 아서와 결혼한다. 노라는 아서에게 ‘인연’이란 단어에 대해 설명한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어. ‘인연.’ 섭리나 운명을 뜻하는 건데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거야. 불교와 윤회 사상에서 온 개념 같아.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해. 전생에 관계가 있었다는 뜻이거든. 그 둘이 결혼하면 8천 겁의 인연이 쌓인 거라고 말해. 자그만치 8천 번의 삶 동안.
전생의 관계를 따지자면 노라와 아서와의 ‘인연’이 해성보다 더 많이 쌓였기 때문에 결혼한 것일 게다. 그래서 노라는 아서에게 “여기가 내 종착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말한다. 나영에게 아니, 이제 노라에게 해성은 그저 과거, 지나간 것일 뿐.
다시 12년 후 현재. 해성은 사귀던 여친이 결혼 얘기를 꺼내자 잠시 시간을 갖자고 말한 뒤 휴가를 얻어 뉴욕에 온다. 오직 나영을 만나기 위해. 해성은 나영을 만나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도 되나, 첫사랑이 아직도 날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뭐 그런 것들일까. 해성은 그때 나영이 한국을 떠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12년 전에 자신이 뉴욕에 왔으면 어땠을까 등등 온갖 가정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해성이 기억하고 사랑하는 건 지금의 ‘노라’가 아니라, 24년 전 나영이다. 뉴욕에서 해성이 만난 사람은 과거의 ‘나영’이 아니라 현재의 ‘노라’다.
"너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난 그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나영과 해성은 서로가 어린시절의 첫사랑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각자가 그 시절을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게 다르다. 해성에게는 연결되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애틋한 미련과 추억이 전부이지만, 나영에게는 해성을 둘러싼 그 시공간의 그리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즉 나영에게 해성만의 독자적인 특별함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해성에게 나영은 ‘떠나는 사람’이고, 아서에게 ‘노라’는 ‘곁에 남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해성은 나영과의 관계가 어쩌면 전생부터 어긋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 전생에 우리는 누구였을까?
- 글쎄...
- 뭔가 불가능한 관계? 왕비랑 왕의 부하 그런 거……
- 아니면 우린 어느날 아침에 나뭇가지에 앉은 새와 그 나뭇가지의 관계일 수도 있는 거지.
나뭇가지와 그 위에 잠시 앉은 새. 스쳐가는 존재들. 그것도 인연이면 인연일 게다. 나뭇가지는 자기 곁에 잠시 머물렀던 새를 기억하고 그리워할지 모르겠지만, 창공을 멀리 날고 싶은 새는 그 나뭇가지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결국 해성은 마음을 정리하고 떠난다.
무게와 깊이가 다른 인연도 있는 법이다. 스쳐갈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섭리나 운명이 있다면, 그렇게 스쳐가거나 머무는 인연 모두 흐르는 대로, 그대로 두면 될 일이다. 살다 보면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영화는 밋밋하고 조용하다. 액션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어쩌면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화면은 어둡고, 미국과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배우들의 한국어 대사들은 자막이 필요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면 묘한 기분이 든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난 전생이든 다음 생이든 관심없다. 전생에 내가 왕이었던들, 다음 생에 세계적인 부자가 된들 다 무슨 소용인가. 또 난 과거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고, 오지 않은 미래의 영화도 기대하지 않는다. 떠나간 사람은 빨리 잊고, 기분나쁜 일들은 더 빨리 잊는다.
난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사람들. 가족, 친구들. 그들과 내가 전생에 나뭇가지와 그 위에 잠시 앉았던 새였든 아니든, 그들이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나의 인연들은 현재진행형이고, 난 이미 세상의 한복판에 있다. ♣
* 사진 출처 : Daum 영화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