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모가 전화를 하셨다. 거의 30여 년 간 통화한 적이 없었던 터라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 새벽이나 밤에 전화가 오면, 또 누군가 오랜만에 연락하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다행히 이모의 목소리는 밝았다. 별일없냐는 말과 함께 진지하게 꺼낸 말씀은, 40여 년 전 우리 엄마한테 천만원을 꿨는데 까맣게 잊었다가 이제 생각이 났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갚겠다는 거였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난 ‘아, 이모가 정신을 놓쳤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예감은 다음날 사촌동생의 전화를 받고 확실해졌다. 젊은 시절 누구보다도 총명했던 분이기에 이모의 병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그러나 난 사촌동생에게 이제 아주 긴 이별여행이 시작된 거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2020)은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면서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7년 동안, 천천히 이별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다. 우리에게 《행복목욕탕》(2013)으로 잘 알려진 나카노 료타가 감독하고, 야마자키 츠토무, 아오이 유우, 타케우치 유코, 마츠바라 치에코가 출연한 일본영화다.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나카지마 교코의 자전적 소설 〈긴 이별〉이 원작이다.
아버지의 70세 생일파티에 모인 두 딸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치매라는 사실을 듣는다.
뇌가 쪼그라들고 있대.
확 나빠지진 않고
조금씩, 천천히 변해간대.
큰딸 마리는 워커홀릭 남편과 사춘기 아들을 키우며 미국에서 살고 있고. 둘째 후미는 도쿄에서 먹고살기 바빠서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본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고 두려울 뿐이다. 교장 선생님을 지낸, 꼿꼿하고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 늘 일이 우선이라 완고하고 무뚝뚝했던 사람. 그러나 가족들은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상태는 그때부터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슈퍼에서 사탕을 훔치고, 소리를 지르고, 바지에 실례를 한다. 그렇게 서서히 아버지는 말을 잃고, 길을 잃고, 기억을 잃고, 인간의 존엄을 잃어간다.
어느날 아버지가 없어져 난리가 난다. 다행히 GPS 추적기를 통해 아버지의 위치를 찾았는데, 그곳은 바로 놀이기구가 즐비한 유원지. 아버지는 누군지 모를 아이들과 회전목마를 타고 계신다. 그 곁에는 우산 세 개가 놓여 있다. 우산을 본 어머니는 그제야 예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낸다. 어머니가 딸 둘을 데리고 유원지에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둘째딸이 그날 아침부터 코를 훌쩍이며 감기기운이 있었단다. 마침 날이 흐려져 비가 오기 시작하고. 그때 우산 세 개를 들고 아버지가 유원지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딸들은 평생 일밖에 모르는 무서운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가슴 한쪽엔 늘 가족의 안부를 걱정했던 아버지의 또다른 모습을 확인한다.
요즘은 많은 것들이 멀어.
멀다고요?
많은 것들이 말야.
너희도, 다른 것들도 다.
멀다는 건 역시 참 쓸쓸한 것 같아요.
잠시 정신이 맑았을 때, 아버지가 손자와 나눈 대화다. 현실은 멀고, 과거는 가깝다. 오늘 일은 잊으면서 먼 과거의 기억은 손에 잡힐 듯 환하게 다가서는 것. 그것이 치매다.
이혼남을 사랑하는 둘째딸 후미. 그러나 그 남친은 아이를 보러 오가며 전처와 다시 가까워지고, 그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고 온 후미는 아버지 곁에 앉아 울며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족을 이길 순 없어요.
그럴 땐 휘유, 하는 거다. 휘유, 해.
아버지는 후미가 아파서 우는 줄 알고 후미의 이마를 만져준다. 힘들 땐 "휘유~" 하고 큰숨을 내쉬라고 말해주는 아버지. 정신을 놓지 않았더라면 자식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아버지여서 그런지 후미는 따뜻한 감격을 느낀다.
어느덧 7년이 지나고 77세의 생일을 맞은 아버지. 가족들은 병실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씩, 천천히 7년에 걸쳐 함께한 아버지와의 긴 이별 여행을 끝낸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미국에 돌아온 손자 타카시. 사춘기 방황이 심한 타카시는 출석을 제대로 하지 않자 교장실에 불려간다. 뭐든지 말해 보라는 교장의 말에 타카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7년 전부터 치매로 고생하셨다는 얘길 한다.
긴 이별(Long Goodbye)이로군.
긴 이별이요?
치매를 ‘긴 이별’이라고도 부른단다.
조금씩 기억을 잃고 천천히 멀어져 가니까.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한 번뿐인 인생. 누구나 잘살고 싶고, 누구나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나도 요즘 들어 자꾸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고, 단어가 기억나지 않아 애쓰고, 지인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 곤란을 겪었다. 꼼꼼이 메모한다고 해도 놓치는 것들이 있다. 물건들이야 그렇다 쳐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잊고, 따뜻했던 기억들을 잃는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생각만 해도 무섭고 슬프다.
결국 중요한 건 하나! 기억이 온전할 때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그 행복한 감정을 솔직하게 자주 표현하는 것. 그것뿐이다. 더 늦기 전에 이모를 찾아뵈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