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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Sep 20. 2024

"저기,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영화 《중경삼림》


영화 《중경삼림》(1994)은 넷플릭스에 홍콩작품, 고전영화로 분류되어 있다. ‘고전영화’라... 영화 전공이 아니어서 영화는 언제부터 ‘고전’이라 부르는지 알 수 없지만, ‘고작’ 30년 전 영화를 고전으로 부르다니...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하긴 문학 강의시간에 1980~90년대 한국소설을 언급하면 학생들은 늘 고전소설이라고 하니, 누군가에게는 30년이 의외로 긴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1995년 첫 개봉 후, 2013년, 2021년, 2022년에 이어 2024년 2월 28일 재개봉했다. 양조위, 금성무, 임청하, 왕페이, 주가령 등이 출연.     


요상한 그 느낌     


Anyway! 간만에 난 넷플릭스에서 《중경삼림》을 다시 보았다. 며칠 전 《아비정전》을 보고 난 후 그 느낌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였다. ‘그 느낌’이란 왕가위 감독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갖는 요상한 마음을 말하는데,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거다. 세기말적인 나른함, 우수어린 눈빛들, 찌질한 인물들이 어쩐지 나와 비슷해서 화나기도 하고 짠해지기도 하고, 슬픈지 외로운지 알 수 없는 싱숭생숭, 춤조차도 슬픈, 살고 싶은지 떠나고 싶은지, 공허한지 충만한지 알 수 없는 표정, 흔들리고 번쩍이는 화면을 쫓다 보면 나도 어질어질, 반복되는 올드팝에 중독돼 며칠간 흥얼거릴 수밖에 없는 상태 등등.     


              

두 커플의 러브스토리    


영화는 두 경찰의 러브스토리다. 경찰 223(금성무)과 경찰 633(양조위)의 ‘이별’과 ‘만남’에 관한 얘기. 서로 다른 커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겹쳐 영화 스토리는 마치 데칼코마니 혹은 뫼비우스의 띠 같다.     

 

‘유통기한’(사랑의 유통기한, 통조림 깡통의 유통기한, 한 달, 1년, 만년)이 반복되고, ‘아미’라는 똑같은 이름(떠난 연인, 알바생), 노란 가발을 쓰고(마약밀매상과 창녀), 편지(떠난 여친의 이별 편지와 페이의 편지)를 남긴다. 또 경찰(223과 633), 스튜어디스(떠나간 연인, 1년 만에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 페이), 캘리포니아(카페, 도시), 낡은 맨션과 그 창에서 보이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이중 스낵바 ‘midnight express’만이 이 모든 인물과 사건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복잡한 도시에서 한 번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은 나와 이름이나 직업이 같을 수 있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거나 최근에 이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걷거나 뛰고, 서있거나 춤춘다. 쫓거나 쫓긴다.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한 화면은 실재감이 증폭돼 어지럽다. 화려한 빛깔이 뭉개지며 흔들린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와 기대선 곳이 바로 스낵바 ‘midnight express'다. 공항이나 터미널 같은 곳. 떠나고 돌아오고 만나고 헤어지고. 전화나 편지로 소통을 꿈꾸지만 결국 불통을 겪는 곳.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어떤 특정인이 아니라 ‘나’일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장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첫 장면에 깔린 내레이션은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매일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지만

아마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고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의 모든 것은 이렇게 조금씩 비슷하게 중첩되면서도 살짝살짝 비껴간다. 연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누구나 스쳐가고, 그 스치는 중에 잠깐씩 멈춰 서로에게 몰입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사랑할 때는 누구나 만년 동안 사랑하겠다 맹세하지만 사랑은 곧 낡고 지겨워져 휘발되고 결국 떠나게 마련이다. 파인애플을 좋아하던 그녀는 떠났고, 그녀를 생각하며 모은 30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다 먹어치운 경찰 223은 새로운 ‘그녀’를 찾아나선다.      


“저기,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경찰 223이 새로운 여인을 만나서 한 첫 번째 질문은 “저기, 실례지만, 파인애플 좋아하세요?”였다. 추격과 도망에 지친 상대가 대꾸조차 하지 않자 일어로, 영어로, 표준어로 다시 말한다.

“파인애플 좋아하세요?”       

                                     


하아, 이 인간, 그런 쓰잘데없는 얘긴 제발.....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맘이 아픈 거냐. 피곤에 찌든 여자에게 질척대며 파인애플 어쩌구저쩌구를 계속 주절대는 남자.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경찰 223과, “사람은 변하니까. 오늘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노랑머리 여자. 비가 올지 해가 뜰지 몰라 항상 썬글라스와 비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


경찰 633 역시 늘 같은 야식(셰프 샐러드)을 연인에게 사다 준다. 그러다가 스낵바 주인이 “여자친구한테 선택지 하나 더 주면 좋잖아”라고 권유하자 피시앤칩스, 피자 등 다른 음식을 사다 주었고, 그 결과 여자는 경찰 633 말고도 새로운 선택지가 있음을 알고 떠난다. 오래되고 익숙하여 습관처럼 이어진 관계와 새로운 선택. 어차피 인생은 선택의 연속. 남은 자가 바보가 아니듯 떠난 사람을 탓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가고 오는 것. 사랑의 완성은 헤어짐이다. 파인애플이나 셰프 샐러드를 아무리 좋아해도 주구장창 그것만 먹으면 지겨운 법. 우리가 '올드보이'가 아닌 이상 '만두'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입맛도 취향도 자꾸 바뀌는 나의 변덕을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데, 하물며 타인을 이해하기란!     


지구에 나 혼자뿐 


뭐 그렇다. 누군가가 떠나면 또 다른 이가 다가와 그 자리를 채우고, 그러다가 다시 스쳐 지나가고, 그게 인생 아닌가. 모두가 스쳐 지나갈 뿐, 지구에는 결국 나 혼자뿐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한가운데 양조위 혼자 오롯이 앉아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컷은 오래오래 내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났는데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 양조위의 눈빛. 저쪽 블록 포스트에서 뭐라뭐라(아마도 순찰일지에 ‘이상 無’라고 썼겠지) 끄적인 뒤 ‘midnight express’ 쪽으로 천.천.히.걸.어.와.모.자.를.벗.고.정.면.을.바.라.볼.때.의.그.눈.빛. 텅빈 것 같으면서도 우수에 찬, 울음을 참는 것 같은 무심한 그 눈빛.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얼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그야말로 숨멎!!! 에그 참. 양조위 씨, 사람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으째.... 내 심장... 내 나이에 이러면 큰일나요~     

                


California Dreamin'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

On such a winter's day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페이가 등장할 때마다 ‘midnight express’에 울러 퍼지던 마마스&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 이 노래처럼 중독성이 강한 게 또 있을까. 아마 며칠간은 시도때도 없이 이 노래가 내 귀에 자동재생될 듯하다. 그때마다 요상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페이처럼 엉덩이를 씰룩씰룩, 고개를 까딱까딱하면서 건들거리겠지. 이 노래를 들으며 나도 캘리포니아를 꿈꾼다. 캘리포니아는 어떤 곳일까? 하긴 누군가 곁에 있다면 딱히 캘리포니아가 아니어도 상관없겠다. 그땐 이렇게 외치겠지. 경찰 633, 양조위의 말대로 아무데나,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重慶森林:Chungking Express>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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