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와강 Oct 04. 2024

생존의 거짓말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아이들도 그렇다. 9개월된 아이도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 일부러 우는 척할 때가 있단다. 어린아이의 거짓말은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상황을 파악해 사실을 그대로 얘기했을 경우 부모가 받을 상처를 걱정하고, 자신의 평판을 생각하며 한 행동이다.        


물론 어른도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실수나 결점을 숨기고 낮은 자존감을 감추기 위해서일 때도 있고,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고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어른의 거짓말도 결국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인 듯싶다. 최근 내가 본 영화에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한 사내가 등장한다. 영화를 보는 128분 내내, 금방이라도 그 거짓말이 들통날까 조마조마하며 불안에 떨었던 난, 당분간은 그 어떤 사소한 거짓말도 하지 못할 것 같다.       


 《페르시아어 수업》(2022)은 바딤 페렌먼이 감독하고,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질 역)와 라르스 아이딩어(코흐 역)이 출연한 러시아와 독일, 벨로루시 합작 영화다. 영화는 살아남기 위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유대인 '질'이 독일군 장교 '코흐'에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담은 드라마이다. 독일의 각본가 볼프강 콜하세의 실화 기반 단편 〈언어의 발명〉이 원작이다.      



유대인 질은 수용소로 가는 포로수송트럭 안에서 만난 남자의 부탁으로 자신의 샌드위치 반쪽과 페르시아 신화집을 맞바꾼다. 그 사소한 우연은 질의 생사를 결정하며, 운명을 바꾼다. 트럭은 곧 멈춰 서고 트럭에서 내린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총탄이 쏟아진다. 질은 그들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자 자신은 페르시아인이라며 그 책을 증거로 내보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질은 수용소로 끌려가 코흐 대위를 만난다. 코흐는 전쟁이 끝나면 동생이 있는 테헤란으로 가 식당을 개업할 꿈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미리 페르시아어를 배워 두려고 한다.      


- '어머니’는 뭐라고 하나?

‘어머니’요?

그래, ‘어머니’는 뭐냐고? 태어나서 제일 처음 배우는 단어잖아. 바로 대답 못하면 총살당할 줄 알아.

‘안타’요.

난 세상에서 거짓말쟁이랑 도둑을 제일 싫어해. 거짓말하는 거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질의 거짓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생존 도구이자 무기, 거짓말. 질에게 페르시아어 수업을 들으면서도 끝없이 그를 의심하는 코흐. 거짓말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언제 들통나 목숨이 날아갈지 알 수 없는 살얼음판의 일상이 보는 사람조차 살떨리게 한다.      



질은 유대인 명부 작성하는 일을 하며 그 수많은 이름을 이용하여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든다. 문제는 단어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단어들을 모두 외워야 한다는 것. 코흐는 무지 성실한 학생이어서 배운 단어를 끝없이 복습하고 외우기 때문이다. 거짓말로 시작한 질의 목숨줄은 이젠 기억력으로 옮겨간다.      


가짜 페르시아어를 마치 하나의 언어로 작품에 등장시키는 데에는 제작진과 출연 배우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제작진은 가짜 페르시아어를 구현하고자 학자들의 조언을 받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바딤 피얼먼 감독은 "동양적이면서도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일관성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영화를 촬영하면서 모든 접미사와 접두사를 포함한 300개의 가짜 단어가 있는 사전을 만들었다"고 전했다.(https://v.daum.net/v/20221206060506042)     


미군이 진격하고 독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코흐는 테헤란에 가기 위해 수용소를 탈출하며 질을 데리고 나와 풀어준다. 결국 질은 그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질은 연합군 심문을 받는다.   

   

당신이 수용소 있는 동안 대략 몇 명의 수용자가 그곳을 거쳐 갔습니까?

한... 2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 돼요.

안타깝게도 수용소의 모든 기록물은 해방 전에 나치가 모두 불태워 버렸어요. 혹시 기억나는 이름 있습니까?

네. 있어요. 말씀드릴게요. 이름 2,840개요.

- 사람 이름이요?

네, 2,840명의 성과 이름요.

그걸 다 외웠다고요?     


질은 울면서 그 이름들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름으로 가짜 페르시아 단어를 만들고, 그 단어들을 죽기살기로 외우며 버텨야 했던 날들. 이름도 없이 사라진 그들 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던 시간들. 그 끔찍한 기억이 이젠 역사의 비극을 증언하는 데 쓰일 줄이야.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10여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영화에는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괴롭히고 죽이는 독일군들의 만행들이 일상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려진다. 독일군끼리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연애를 꿈꾸고 농담하는 등 전쟁중에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는 설정이다. 그래서인가, 영화는 전투씬이 하나도 없는데도 전쟁의 참상들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끔찍하고 추악한 과거라도 남은자들이 기억해야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기억해야 했던 질의 삶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름에 붉은 줄이 가고, 명부를 불태워 존재조차 감추려 했던 그 수많은 이름의 당사자들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닐까. 그 수많은 이름들이 왜...........지, 누..그.랬..지, 그 사실을 온힘을 다해 기억하라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거짓말로 시작한 영화가 어느새 역사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               




* 사진 출처 : Daum 영화 정보     

이전 27화 꿈을 좇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