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 쌀쌀한 날씨가 마음까지 서늘하게 한다. 참 이상도 하지. 피곤할수록 잡념이 없어져야 하는데, 피곤해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생각들이 있다.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자꾸 새끼를 치면 결국은 오만잡생각, 그러면 또 불면.
오늘밤도 엎치락뒤치락 잠 못 들다가 결국 일어나 앉아 영화를 고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구리구리한 것 말고, 엄청 달달구리한 것! 로코가 좋겠다. 꽁냥꽁냥하는 남들 연애사 보며 헤벌쭉 내 마음도 따뜻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 《노엘 다이어리》(2022)는 찰스 샤이어가 감독하고, 저스틴 하틀리(제이콥 역)와 배럿 도스(레이첼 역)가 주연한 미국 드라마이다. 원작은 리처드 폴 에번스가 쓴 ‘노엘 4부작’ 중 첫 번째 소설인 〈노엘의 다이어리〉. 우리나라에서도 동명의 영화 개봉에 맞춰 2022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스포일러 주의)
제이콥은 베스트셀러 작가다. 여럿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편한 제이콥.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어머니의 부고를 들은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려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는다. 어머니가 저장강박증이었던 탓에 집안은 잡동사니로 발디딜 틈이 없다. 그것들을 치우며 며칠 그 집에 머무는 내내 건너편에서 이 집을 주시하는 한 여인과 마주친다.
레이첼. 입양아였던 그녀는 자신의 친모를 찾는 중인데, 이 집이 친모의 마지막 주소지란다. 제이콥은 그녀를 집안으로 데려와 이야기를 나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제이콥은 음악 취향이 잘 맞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레이첼이 찾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오랫동안 옆집에 살던 엘리는 분명 그녀를 알 거라며, 엘리가 외출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둘은 함께 밥을 먹는다. 제이콥이 얼마나 유명한 작가인지 모르는 레이첼은 제이콥이 글쓰고 있다고 하자 그를 가난한 글쟁이로 오해한다.
- 고군분투하는 예술가예요? 알겠어요.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고군분투하며 사는 거죠.
- 정말 그렇네요.
이탈이아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능통한 레이첼은 현재 UN 통역관을 지원한 상태라고. 그녀는 행여 가난한 글쟁이가 자신의 저녁 식사 값을 낼까봐 더치페이를 하는 등 제이콥을 배려한다. 밥 먹으며 레이첼은 아직 약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앨런이라는 약혼자가 있다는 얘길 한다.
- 약혼이라는 개념에 대해 상반된 감정이 들어요. 확실성은 맘에 들지만 뭔가 꼼짝못하는 기분이랄까요?
- ‘꼼짝 못하는’ 건 나도 평생 피했던 거네요.
레이첼은 성격도 생각도 다른 앨런과의 약혼에 사실 확신이 없다. 그러면서도 앨런과 약혼을 강행하려는 이유를 레이첼은 이렇게 설명한다.
- 뭐랄까, 난 입양아로서 늘 헛헛함을 채우려 하거든요. 항상 안정과 신뢰를 원해요. 그래서 진짜 생모를 찾으려는 거예요. 내 인생의 큰 불확실성을 해결한다면 뭐랄까.
- 자유로워지겠죠.
- 네.
앨런과는 달리 제이콥과 레이첼, 둘은 이야기하면 할수록 쿵짝이 잘 맞는다. 척하면 척. 생각과 성격, 취향이 비슷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엘리는, 레이첼이 찾는 그녀가 아마 제이콥 집의 베이비시터였을 거라는 말과 함께, 자세한 얘기는 제이콥의 아버지가 알고 있을 거라는 얘길 한다. 제이콥은 35년간 연을 끊고 살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해 가지 않으려 했지만, 레이첼이 혼자라도 자신의 아버지 집을 찾아가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동행한다.
제이콥의 아버지가 산다는 콘월 브리지로 가는 길, 내내 눈이 온다. 겨울 풍경이 아름답다. 레이첼은 차 뒷좌석에서 제이콥이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며 챙긴 상자 속에서 ‘노엘의 다이어리’를 발견한다. ‘노엘’, 자신의 어머니 이름이다. 노엘이 17살에 임신한 채로 집에서 쫓겨나 제이콥 집에 베이비시터로 들어온 얘기부터 자신의 일상을 모두 기록해 놓은 일기장이다. 레이첼은 노엘의 일기를 읽으며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는지 확인한다.
- 난 평생 엄마가 날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를 만나 이유를 묻고 싶었죠. 하지만 일기를 읽고 나니 엄마가 날 정말 사랑했다는 걸 알겠어요. 진짜 중요한 건 그게 다였죠.
제이콥 역시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자신이 아버지를 오해했다는 걸 확인하고 그와 화해한다. 제이콥과 레이첼, 둘은 여정을 함께 하며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레이첼의 생일을 맞아 함께 축하하고 춤추며 즐긴 다음날, 레이첼은 편지만 남기고 떠난다.
- 제이콥의 삶은 나와 달라요. 인스타 팔로워가 100만 명에 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니 나한테도 적극적으로 다가왔겠죠.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난 삶에 확신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제이콥과 함께 한 시간이 정말 좋았지만 확신은 부족했어요. 그러니 이제 우리 너무 늦기 전에 헤어져요.
제이콥은 레이첼의 집을 찾아가 창을 사이에 두고 전화로 진심을 전한다.
- 날 봐요, 평생 혼자 사는 삶을 추구했었죠. 우리 같은 사람은 누굴 믿는 게 참 어려워요.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힘들죠. 이해해요.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왔잖아요.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믿어달라고 애걸하고 있어요. 진심이에요. 날 믿어줘요.
그러나 레이첼은 제이콥의 고백을 거절한다. 쓸쓸히 돌아선 제이콥. 크리스마스 날, 어머니의 집을 정리하고 자신의 집으로 출발하려고 할 때 제이콥은 건너편에 서 있는 레이첼을 발견한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쪽을 빤히, 그러나 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해피엔딩. 하긴 로코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영화에서만큼은 모든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이 영화처럼 부자와 모녀 간의 갈등도 해결되고, 연인 간의 오해도 불식되어 믿음과 환희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는, 그러나 누구보다 더 강렬히 ‘믿음’을 갈구한 두 남녀가 서로에게 확신을 느끼며 사랑하게 되는 스토리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번역이 좀더 매끄러웠다면 좋았을 것이다. 직역해 놓은 듯한 어색한 대사가 인물이나 스토리에 몰입하는 걸 끊임없이 방해하는 느낌ㅠㅠ)
사실 나도 누군가를 잘 믿지 못한다. 처음부터 이랬는지, 살다보니 (끙...수많은 배신의 상처들!) 이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사람을 아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들을 믿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미션을 통과해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충성하는 편이다. 내 편이니까! 물론 사람 관계에서 영원한 건 없다. 그러니 내가 충성하는 그대들, 잘해! 나, 언제 삐질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