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이란, '편안한 고통'
나는 어떨 때 무기력해지며, 어떻게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좀처럼 힘이 나지 않는 일요일이다. 아아를 폭풍드링킹하여 어떻게든 기운을 보강해보려 해도, 따가운 햇볕 아래 서는 순간 모든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날씨에 걸맞게 오늘은 '무기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요즘 같은 때엔 누구나 어느 정도의 무기력을 겪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외출을 줄이고 집에만 있는 상황이고, 밖에서 단 5분도 편안하게 걷지 못하게 하는 뜨거운 더위도 한몫한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무기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다. 1학년 때는 고등학교 때에 비해 급격하게 늘어난 자유시간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모든 자유시간을 알차게 채워나가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돼서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했다. 무기력한 상태를 인위적으로 없애기 위해 항상 바쁘게 지냈다. 그러나 바쁘게 지낸다고 해서 무기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유롭게 지내도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는 반면, 스케줄이 꽉 채워져 있어도 내가 내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무기력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고시를 시작하고 나서 무기력은 더욱 심해졌다. 언제나 의욕은 넘치고 스스로에 대해 바라는 게 많지만, 내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마다 자책하게 되고, 자책은 필연적으로 무기력을 수반하였다. 그리고 무기력은 우울감과 부정적인 생각을 증폭시키며 감정적인 악순환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정말 갖은 수단을 써 봤다.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기, 무기력할 틈이 없도록 최대한 많은 일을 벌여놓기, 일기 쓰기, 취미 활동 하기, 스스로에게 명령해보기 등. 모두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쫓아내도 무기력은 예약손님인 것마냥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어느 순간부턴가 무기력해지면 "그래 또 왔니?"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가 항상 무기력하고 별 의욕 없이 사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 성격은 무기력과는 거리가 멀다. 추진력 있고 톡톡 튀는 편에 더 가깝다. 친한 사람들조차 내 무기력한 모습을 잘 모른다. 그래서 무기력할 때의 내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 또한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기력한 나는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순간, 무기력에 대처하는 방법조차 알기를 거부하게 되고, 다음번에 무기력이 찾아왔을 때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게(?) 된다.
"무기력한 나"도 나임을 받아들이고 나자, 무기력한 상태의 나를 직면할 용기가 생겼다. 또 무기력하지 않을 때의 내 모습과 어떻게 그렇게 다른 상태가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번은 무기력할 때의 나를 관찰해 본 적이 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나 싶겠지만, 신기하게도 가능했다. 우선, 힘이 거의 없어진다. 그리고 힘을 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다. 가만히 엎드려서 자거나 폰을 본다. 폰 보면서도 전혀 즐겁지 않다. 그런데도 그 행위를 끊기가 힘들다. 자는 건 처음부터 졸려서 잔다기보다는 도피성 잠에 가깝다. 자고 일어나면 시간이 지나있을 테고, 그러면 이 하루가 조금이나마 더 빨리 끝날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무기력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찾아온다.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해보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용기가 없을 때 무기력해진다. 다시 말하면, 잘하고 싶은 욕심이 역으로 모든 일을 손에서 놓게 하는 무기력을 불러온다. 무기력을 나름대로 정의해보면 '편안한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니 편안하지만, 마음은 온갖 잡생각의 부담을 떠안고 고통에 시달린다.
이렇게 나에게 찾아오는 무기력을 정의하니,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무기력은 "편안"하기는 해도, 결국은 "고통"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상태에 오래 머무를수록 편안함보다는 고통이 커지고, 결국 고통을 느낄대로 느끼고 나서 무기력에서 빠져나오면 너무 많은 시간이 낭비되어 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무기력이 주는 고통을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한다. 그러면 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뭐라도 시작하게 된다. 둘째, 완벽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현실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은 잘하고 싶다는 욕구가 커서 그렇다. 대충 하자는 마인드로 시작해도 좋다. 어차피 대충 시작해도 하다보면 다시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처음 기대한 것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무기력 상태와 번아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무기력은 약간만 자극을 줘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지만, 번아웃은 위 두 가지 방법을 써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럴 때는 넉넉하게 기간을 잡고 쉬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할 말은 없는게, 제대로 쉰다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른다. 지금 연습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무기력은 편안한 고통이 아닐까?"라는 아이디어 정도만 가지고 있었다. 무기력 극복의 실마리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데 글쓰기가 얼마나 도움되는지 또 한 번 느낀다.
20대 초반의 나는 무기력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내가 그런 상태가 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년에 걸쳐서 무기력을 자꾸 만나고, 관찰해보고, 무기력한 나 자신과 대화해 보는 등 무기력과 '친해지려고' 하니, 무기력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기력이 이제는 좀 귀여워보이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나를 너무 좋아해주는 친구라, 아마 평생 나를 가만 내버려두진 않을 것 같다. 그때마다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