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결산

3주 남짓한 여름 휴가 동안 배우고 느낀 것들의 기록

by 도토리

2021.7.13~7.31

고시 시작하고 처음으로 "작정하고" 가져본 휴가가 와르르르(?) 끝났다. 제대로 재충전하고 싶어 이것저것 계획을 많이 짰는데, 계획 성취율은 꽝이고.. 그냥 끌리는 대로 쉬고 놀고 공부 조금 끄적였다.

사실 휴가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와 쉬고 있다! 너무 행복하다!"보다는 "어떻게 쉬면 제대로 쉬는 거지..?"였다. 단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상태가 쉬는 상태는 아닐 텐데. 몸도, '마음도'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 하는 것도 서투르고, 열심히 쉬는 것도 서투르다. 애매하고 어정쩡, 다들 그렇게 시작해서 발전해나가는 거겠지.

그래도 휴가의 막바지에 선 지금, 후회는 전혀 없다. 많이 쉬었고 많이 배웠고, 무엇보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어졌다. 휴가에 계속 머무르고 싶고 미련만 잔뜩 남는다면 그게 제대로 쉰 걸까? "이만큼 쉬었으면 됐다"란 느낌이 들어야 잘 쉰 것 아닐까.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면 그냥 "어떻게 어떻게 쉬었다"는 애매한 느낌만 남을 것 같아, 나의 휴가에 대해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나열해보겠다.


1. 여기저기 다니기


원래 여행을 계획해서 하루동안 다녀오려고 했었는데, 너무 덥고 귀찮아서 그냥 기회 되는 대로 서울 이곳저곳 가 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가족과 처음으로 호캉스를 다녀왔다. 호텔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하고 뒹굴거리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거기다가 알싸한 와인을 곁들인 고급진 뷔페, 호캉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식 뷔페까지 그야말로 완벽했다. 여름 탓인지 식욕이 없어서 많이 먹진 못했지만 아무렴 괜찮았다.


내가 좋아하는 박물관에도 다녀왔다. 더울 때 박물관, 미술관만큼 좋은 피서지가 없는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 전시에서 예상치 못하게 내 꿈의 출발선에 있었던 롤모델의 초상화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 초대로 갑자기 간 서울공예박물관에서는 평소에 관심있지도 않았던 도자기, 귀걸이 등 공예품들을 보면서 마냥 감탄하기도 했다. 종종 미술을 보러 다녀야겠다고 다시금 마음먹은 계기가 됐다.


2. 사람들 만나기


학기 중에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가 학교로 와 주기도 했고, 내가 친구 있는 곳으로 가기도 했다. 랜선 모임을 갖기도 했다. 특히 zoom에서 성경을 읽고 삶을 나누는 모임을 자주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을 만나고 나면, 나와는 다른 그 사람의 무언가에 감동하고 자극받는다.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서로 격려하고 조언해줄 때는 "이래서 내가 사람을 좋아하지"하는 짜릿한 느낌이 든다.


3. 글쓰기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마음껏 해소하는 시간이었다.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장에 옮겨놨다가, 각 잡고 1-2시간 동안 한 편의 글을 미친 듯이 써 내려간다. 세어보니 휴가 기간 동안 총 13편의 글을 썼다. 마음과 일상에 대한 글도 쓰고,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는 글도 썼다. 물론 전자가 후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후자의 글은 8월부터 시작할 답안 연습에서 실컷 할 테니까.


브런치 작가 합격하고 나서,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 글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대중적인 컨텐츠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게 되었기에 글쓰기를 이전처럼 가볍게만은 생각할 수 없겠다 싶었다. 훗날 글로 돈을 벌고 싶다는 막연한 꿈도 갖게 됐다. 하지만 그건 너무 먼 일이고, 지금으로서는 글쓰기가 내 일상에 적절하게 융화되도록 하고 싶다.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글쓰는 시간을 따로 지정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매력은 '글쓰기 이전의 나'와 '글이 완성된 후의 나'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글의 개요를 완벽하게 짜 놓고 개요대로 쓰는 사람들도 있던데 참 신기하다. 나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나는 편이다. 내 글은 대부분 "문제 제기 - 해결"의 구조로 이뤄져 있는데, 보통 글을 쓰기 시작할 땐 "문제 제기"까지만 생각해놓는다. 해결은 신기하게도 글을 쓰면서 조금씩 생각이 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글쓰기는 "나 자신과의 대화 과정"이다.


공개된 플랫폼에 글을 올리고 나면 사람들의 반응이 몹시 신경쓰인다. 누가 글을 봤는지부터 해서 어떤 댓글이 달리는지까지. 별 반응이 없으면 글이 별로였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반응이 신경쓰이는 것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이 훨씬 강하기에, 무반응이든 유반응이든 앞으로도 신나게 써제낄 것이다. ㅎㅎ


글을 자주 쓰다 보니 평가받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국제정치 전문 교수님께 내 글을 보내보기도 했는데, 답장을 주셔서 정말 기뻤다. 브런치 작가에 지원한 것도 나를 계속 평가 무대에 올리고자 함도 있었다. 앞으로도 내 글을 평가받을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4. 국제정치 리딩 정리


유튜브 '나중에 볼 동영상', 이메일, 페이스북 타임라인 등 여러 곳에 나중에 보려고 킵해둔 자료들을 클리어했다. 평소에는 진도에 차질이 생길까봐 바로바로 공부하지 못한 자료들이다. 주요 국제정치 현안, 경제 동향, 알아두면 좋은 개념 등을 정리했다. 물론 수험적합도가 아주 높지는 않다. 그래서 현안 정리의 비중도 앞으로는 대폭 줄일 예정이다. 그럼에도 외시생이 국제사회의 현실에 관심이 없다는 건 말이 안되니, 앞으로도 잠깐씩 시간을 내서 좋은 글을 읽고 내 시각을 기를 것이다. 다만, 이론 공부를 좀더 열심히 해서 내 시각을 학문적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5. 매일 고시반 출석


아무리 휴가라지만 생활 리듬은 관리해야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편할 것 같았다. 학교 생활스터디에 참여하며 꼭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매일 고시반에 출석했다. 사실 내 짐이 전부 고시반에 있으니 여기가 제2의집이나 마찬가지다. 열람실이 주는 특유의 아늑함이 좋다. 거기다 에어컨도 빵빵하다. 여기 실원으로 있는 동안은 최대한 누려야 한다.


6. 마음 관리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로 글을 쓰면서 나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내 마음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방법도 몇 가지 터득했다. 그 중 몇 가지를 복기해본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쉽게 무너지는 편이었는데, 하도 힘든 일을 많이 겪고 무뎌져서 그런가 내가 이전보다 강해졌음을 느끼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예컨대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서 힘들어지면, 예전에는 모든 공부를 내팽겨치고 다른 무언가로 도피했다. 그런데 그 짓을 반복하다 보니 도피해봤자 언젠가는 다시 차가운 현실로 돌아와야 함을, 그리고 빨리 돌아올수록 타격이 덜하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달은 것 같다. 사실 이제는 힘들어하는 행위 자체가 귀찮다.


그래서 이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거나 안 좋은 말을 들어서 힘들면, 일단 먼 허공을 응시하며 운다. 그런데 막 정열적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 멍때리면서 눈물이 흐르는 대로 나 자신을 냅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눈물이 그친다. 힘듦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나에게 잠시 왔다가 떠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힘든 것을 떨쳐내기 위해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부정적인 감정은 조용히 물러간다.

감정이라는 것은 상당히 변덕스럽고 비이성적이라서, 감정에 따른 결정은 되도록 안하는 편이 낫다. 감정은 붙들고 곱씹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떠내려 가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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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휴가를 마무리한다. 8월부터는 다시 수험생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할 게 정말 많지만 조급하거나 두렵지는 않다. 너무 멀리 보기보단,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을 꾸준하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먼 여정의 끝에 서 있겠지?

새 힘을 얻고 싶을 땐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고 산책도 하면서, 지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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