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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타쟌 Nov 15. 2024

실버들의 전쟁

첫사랑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채우는 트롯이란 장르의 가요 대회가 한창이다. 코를 박고 즐겨보는 아내를 향해 물어본다 "노래가 그렇게 좋아?" 돌아온 대답은 "응 재밌잖아 당신은 재미없어?" 하고 되묻는다. "응 나도 재밌지 그렇게 보면 지겹지 않아? "하고 물으면 "아니" 하고 시선을 티브이에 고정시킨다. 막걸리 한잔을 걸쭉하게 부르는 가수, 보리고개를 겪었던 고단한 삶을 부르는가 하면 이도저도 못하는 사랑을 부르는 가수의 애절함이 거실을 가득 채운다. 한때는 드라마에 빠져서 동서들 생일은 몰라도 드라마 주인공 시할아버지의 제삿날은 명료하게 기억하며 손짓 발짓으로 눈이 초롱초롱 빛나던 아내가 아니었던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읽고 있는데 노랫소리가 쾅쾅 울린다. "아 볼륨 좀 줄여"라고 소리치니 구시렁거리며 소리를 낮추는데 들릴락 말락 한 노랫소리가 신경을 더 거스른다. 여러 노래가 지나고 귀에 익은 가사에 귀가 쫑긋 하고 선다.  “철없이 매달리며 춤추던 사랑의 시절” 

 

 벌써 오십 년이 흘렀다 귀밑 솜털이 바르르 떨리던 열네 살 소년의 가슴에 아직도 시냇물처럼 흐르는 기억말이다. 시골 중학생에게 서울에서 내려온 여선생님은 선녀가 따로 없었다. 어깨에서 시작된 흰색 줄이 발목까지 선명하게 이어진  붉은색 운동복을 입고 단발머리에 지휘봉을 잡은 체육선생님의 모습은 현기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선생님에 대한 사랑은 체육시간에 입는 하나밖에 없는 운동복을 세탁하는 것이었다. 혹여라도 잘못 빨까 봐 체육복은 직접 빨았다. 작은 벽돌 반만 한 빨래 비누로 하였는데 나중에는 누나가 아끼는 꽃향기 나는 세수 비누로 옷을 빨다가 걸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강박이 조바심을 일으켰다. 추운 날씨에도 손이 빨갛게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차오르는 것도 모를 정도로 빨래를 하였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나타났고 어느덧 가슴에 큼직한 바위로 들어앉았다.  

 

 어느 날 총각선생님이 체육선생님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 깔깔 호호 운동장 옆 미루나무 잎사귀가 박수를 치는 듯 웃음소리가 뛰어다녔다. 그걸 보며 나는 질투심 가득 눈에 불이 붙었고  둘을 떼어놓아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옳지 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지체 없이 운동장을 달려가  서울에서 전화 왔음을 알렸고 선생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오신 선생님들에게  전화가 오면  교무실 심부름하는 사람이  와서 전화받으라고 알려주곤 했다. 달리듯 교무실로 향한 선생님은 잠시 후 쥐휘봉을 움켜쥐고 어떤 놈이냐고 식식거리며 찾아다녔고, 난 숨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지 않은 전화가 왔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다 어느 초라니 방정 동급생 놈이 나의 신원을 고해바쳐 엎드린 자세로 몽둥이찜질을 당하였다. 아픔보다는 남자선생님을 떼어놓은 성공이 훨씬 커서 매 맞는 내내  만족한 미소를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후에도 선생님에 대한 나의 애정은 식을 줄 몰랐고 점점 상사의 고통으로 애가 닳았다. 선생님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매번 당신을  어른이라 강조하며 나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 

 

 총알 같은 시간은 우리를  졸업이란 명분으로 갈라놓았다. 선생님을 보고 싶은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길가에 핀 꽃에도,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한 여름밤의 총총한 별에도 선생님이 있었다. 그렇게 애와 장이 녹아내릴즈음 선생님과의 전화통화가 이루어졌다. 고등학교 입학이 좌절된 것에 아파하셨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익모초보다 더 쓴 이별통보 같았다. 후로는 더 이상의 만남도 전화도 없었다. 

 

 한강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눈길이 머물던 서부이촌동 어디쯤이 선생님댁이라는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그렇게 소나기 내린 후에 맡아지는 흙냄새 같은 풋풋한 시절은 물결처럼 흘러갔다.

 

 선생님의 얼굴을 사진처럼 눈에 넣고 세월을 달리던 어느 날, 업무차 들린 곳에서  여인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옛날 선생님과 닮은 것이  아닌가? 숨이 멎는듯하였고, 난 무릎 꿇듯 구애를 하였다. 첫눈에 반했다며 너스레를 떠는데 옆에 있던 문주란 닮은 허스키한 음성이 들려왔다." 얘 남자친구 군대에 있어요"라고 세모눈으로 쳐다본다. 아 그렇군요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나요? 그리고 저는 이미 군대를 다녀왔습니다. 하니 푸하하 웃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의 고종사촌 언니였다. "얘 저 사람 재미있다 너 한번 사귀어볼래?


 세상을 다 가진듯한 벅차오르는 기쁨은 늘 소중하고도 조심스러웠다. 연애기간 내내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봄딸기처럼 향기롭고 달콤했다. 지금도 움켜쥐면 깨질까, 콱하고 안으면 부서질까 조바심이 인다. 오십 년 전 철없던 시절 활짝 핀  백합처럼  내 곁에 있는 아내는 첫사랑이 보낸 선물은 아닐까? 오늘도 그녀는 나의 팔베개에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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