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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타쟌 Oct 16. 2024

시애틀 타잔의 이민 이야기 30

페인트로 꽃을 그리다 3


박사장은 주로 엘에이 부촌에서 페인트를 했는데 

산타모니카 그리고 팔로스버디스 말리부 멀리는 옥스나드 벤추라까지 다녔다.

해안가  숲에 싸인 고급 주택을 주로 했다.

고객들은 은퇴한 노인들 집이었으며 그래서 그랬는지

박사장은 페인트를 칠해주는 거 외에 비설거지를 해준다거나

뒤뜰의 구석구석 가려운데 긁듯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일을 맡긴 노부부들은 이따금 커피며 쿠키도 내어주었다.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일감이 떨어 지질 않았고 한번 일을 맡겼던 사람들은

박사장만 찾아서 오래된 단골들이 많았다.

박사장은 영어 하고는 철천지 원수인지 한마디 하지  않았고

눈빛과 손짓 특유의 미소로 모든 걸 해결하였다.

그에게 일감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대전에 있는 모 여고 영어선생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얘기가 재미있다. 

 어느 날 선생님을 사모한다며 교복 앞 단추를 풀어헤치고 달려드는 

여제자를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반갑게 꼭 안아주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 타이틀이 뎅그렁 땅에 떨어졌단다.


여고생 제자도 맹랑했지만, 그것은 철없어 그랬다 치고 선생이란 작자가

가르치라는 영어 작문은 안 가리키고 영자의 전성시대 3편을

제자와 주연이 되어 찍었으니 이를  어쩌랴?

학부모의 지탄이, 학생들의 원성이, 동료 교사들의 질투가 하늘 높이 치솟아

선생은 미국으로 도망치고 "내가 그렇게 만만한 콩떡이니?" 하고 

학교를 작파한 여고생 제자는 미국까지 쫓아와 기어이 한 이불을 덮었단다.

이후 애를 하나 낳더니 그동안 선생님 선생님 하던 제자가

반말 비슷하게 바뀌고 얼마 안 되어 입장이 완전히 뒤집혀  선생은 꼬랑지 

한번 제대로 못 펴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더란다.


박사장의 일솜씨는 시원하고도 꼼꼼해서 의뢰인들의 흡족한 미소가

소문으로 이어져 다시 찾는 것은 물론이요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데 불이 났다.

여고생을 사랑한 꼬랑지 선생을 통하지 않고 일을 하면 수입이 훨씬 많았지만

소개받은 사람은 반드시 꼬랑지 선생에게 연결하여 수입을 나누었다.

꼬랑지 영어선생이 하는 일이라고는 서류와 컴플레인 전달 정도였다.

한 번 맺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그런 그의 마음이 단단해서 좋았고,

나름 낭만과 의리가 있더랬다.

박사장은 페인트 공사를 마치기 전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다가

공사가 끝나면 술집을 갔는데 아가씨 서넛을 한꺼번에 불러놓고

오직 노래하고 대화하는 걸 즐겼다.

매너가 얼마나 좋은지 가기만 하면 친정 오라비 온 것처럼 좋아했다.

당시에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던 나는 빈방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에서 홀랑 들어먹고 미국 오기 전

마음과 몸이 지칠 대로 지쳐서 한얼산 기도원을 갔더랬다.

그때만 해도 반주로 소주 두 병이 기본이요 담배는 하루 두세 갑을 피울 때였다.

쉰 다섯 아버지가 마흔 다섯 어머니와 불타는 사랑으로 낳은 막내 여동생의 

손에 잡혀 기도원에 갔었다. 


가기 전 담배 네 갑을 사서 점퍼 주머니에 넣고 갔다. 

돌아가신 이천석 목사의 후임으로  며느리인 윤은희 전도사가 있던 때다.

강당에 들어서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찬송이 흐르는데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왈칵왈칵 철철철 쏟아지더라.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날 믿음 줍소서"


가사가 그물로 다가오는데 난 그 그물에 걸려

꼼짝도 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로 콧물로 범벅이 된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날 나는 창피고 뭐고 그렇게 고꾸라졌다.


그날에 흘린 눈물은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눈물 양이리라.

그리고 잠깐의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피우던 담배는 물론이요

가져간 네 갑 모두를 꺾어서 푸세식 아득한 그곳에 미련 없이 던졌다.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모금의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다가 바로 밑에 여동생을 보내고

설움을 이겨보려 손을 내밀었다가 지금은 아주 가끔 분위기에

따라 조금도 마시고 많이도 마신다.


박사장의 매력은 아가씨들에게 술도 권하지 않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고 듣는 것이었다.

팁 또한 후하게 주었고 술집을 나설 때 어떤 아가씨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술 취한 박사장을 모시고 가는 나는 야근 수당은 없었지만,

내일 아침 사모님이 끓여줄 북엇국에 입맛을 다시고 힘차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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