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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타쟌 Oct 09. 2024

시애틀 타잔의 이민 이야기 27

아버지 3


다음날 오후가 되어도 기척이 없자 기도원 사람이 올라왔다.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괜찮냐고 묻는다. 괜찮다고 말하니 물은 좀 드셨냐면서 

물병 하나를 놓고 가더라. 그러고 보니 이틀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더라.

그렇게 마신 물보다 더 흘린 눈물 덕분인지 머리는 얼음처럼 맑았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추억을 한 자 한 자 적어가기 시작했는데,

노트 반 권이 채워지면서 읽으며 울고 쓰며 울기를 하루 이틀.

아직도 그 노트를 보면 비가 내린다.

사흘을 울다가 울다가 산을 내려왔다.


갈 수 있는데 못 가는 것과, 갈 수 없어 못 가는 차이는 이루 말하지 못한다.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드린 나는 평생을 쓰디쓴 회한에 몸부림치며 살고 있다.

아마도 이 고통은 아버지를 만난 다음에야 멈출 수 있으리라.

인근은 물론이요 근동의 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두 형님들이 다니는 회사 동료들이며

형제들이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이 조문을 왔다.

삼일장으로 모셔야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날이 일요일이라 어머니의 주일날 장례는 있을 수 없다며,

다음날 월요일에 사일 장으로 모셨단다.

주위에서 쑥덕거렸지만 어머니의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장례절차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아버지의 임종은 어머니와 큰 형님 바로 밑에 여동생과 막내 여동생이 지켰고,

쌍둥이 두 놈들이 옆에서 지지배배 하면서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재롱을 부렸다.

마침 감리교 지방 연회를 마치고 곧바로 오신 목사님이 아버지 가시는 길을 배웅했단다.

임종 전 아버지 곁에 있던 큰 형님이 큰 차도가 없자 부천 집에 올라간다 하니,


어머니가 그러셨단다 "너 지금 가면 아버지 임종은 못 본다" 하니 형님이 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날 오후에 돌아가셔서 하마터면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할 수 있었기에 가슴을 쓸어내렸단다.

장례일정 전반을 고종형 되는 병호 형님이 진두지휘하여 빈틈이 없었다.


전에 막내 작은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염습을 드려야 하는데,

함께 하자고 형님들과 사촌 형들에게 병호 형님이 말하니 슬금슬금 다 꽁무니를 빼서

막 신혼을 시작한 내가 자청한 일이 있었는데 자단향을 내기 위해 향나무를 삶으면서

나에게 막소주 한 사발을 따라주며 하는 말이 누구라도 시신 앞에 서면 손이 움츠려 든다.

그러니 이거 마시고 긴장을 풀라 하시더라지.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염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하얀색 꽃송이가 만발로 핀 상여에 평소에 자전거로 다니시던 그 길을

아버지는 누우셔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가를 들으시며 휘 둘러보시고

할머니 잠드신 곳 열 발자국 남짓한 옆에 모자의 상봉을 마련하였다.


다시는 세상 설움이 들어가지 못하게 석관 안에 모시고 회반죽으로 모든 틈새를 막았단다.

돌아가시기 전 잠깐 의식이 돌아오셨을 때 태유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셨고,

어머니 손을 잡으시고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셨다고 하시더라.

생전에 어머니의 애간장을 무던히도 흔드셨던 아버지는 여자들이 감내하기 힘든

일들도 많았다. 아버지는 로맨스라고 강하게 변명하실 수 있겠으나

어머니 입장에선 시퍼렇게 날 선 도끼를 손에 잡을 일이라 미안도 여러 번 하셨으리라.


장례를 모신 후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은 인근에 있는 점방이며 주막을 다니며,

혹 아버지가 외상 하신 일이 없으신가 묻고 다녔단다.

없다고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상을 알아보며 다니는 사람은 머리 털나고

당신들이 처음이라 하더란다. 

그렇게 찾아다니다 독암 정류장 근처 점방에서 전에 아버지가 오셔서 친구분과 드신 

막걸리 값이 천 몇백 원이 있는데 얼마 되지 않으니 안 받겠다고 하더란다.

알려 주셔서 고맙다 하고 그 값을 치르고 왔단다.

황구 두 마리를 잡아 수고한 동네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장례에 참여했던 교회 식구들에겐 내복과 양말 수건 등속으로 감사를 전했단다.

장례기간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신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독하다고

입방아 찧는 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장례를 마친 후 열흘을 대성통곡하셨단다.


기도원에서 내려오니, 권사님 큰며느리가 흰 죽을 내놓아

먹물 찍듯 간장을 찍어 한 그릇을 싹싹 비우고 잠이 들었는데,

같이 일하는 멕시칸 여자 후디가 미스타 킴 렛츠고 하며 일하러 가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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