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과 마카롱. 프랑스는 현지화의 초능력자
프랑스는 현지화의 대가
프랑스의 대표 빵이 무엇이냐 물으면 누구나 크루아상이라고 답할 것이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저트에 대해 물으면 누구나 마카롱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 같다.
그런데 크루아상과 마카롱이 프랑스가 기원(origin)이 아니라 다른 유럽 나라에서 프랑스로 전파되었고, 그 후 오리지널을 만든 나라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프랑스만이 기억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이 않을 것 같다.
결론을 먼저 얘기하면 프랑스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체화하고 더 발전시키는 현지화(localization) 능력이 최고인 나라라고 생각된다. 불어와 같이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프랑스를 배타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유연하고 수용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크루아상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간 마리 앙트와네트가 오스트리아에서 가져간 빵
크루아상은 불어로 초승달을 의미하는 크레센트(crescent)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실제로는 가운데가 두껍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모양도 있으나, 대표적인 형태는 초승달 모양이다.
이 크루아상의 종주국은 프랑스가 아니라 오스트리아라는 이야기가 정설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크루아상을 프랑스로 전파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던 비운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프랑스의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간다. 프랑스로 시집간 이후에도 고향 오스트리아의 빵을 그리워해서 오스트리아 제빵사를 초빙하여 빵을 만들어 즐겼고, 그때부터 프랑스에 전파된 빵이 버터를 넣어 페스트리 형태로 진화하면서 지금의 크루아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크루아상이 초승달 모양인 데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 초승달 모양은 지금의 터키 국기에도 있는데, 이 둘 간에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 옛날 오스만투르크는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1529년과 1683년, 두 번에 걸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공격한다. 비엔나는 다이 중부 유럽 독일, 서유럽 프랑스로 진격해 나가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 두 번의 비엔나 공격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데, 특히 1683년 침공 때는 오스만투르크가 비엔나 성채를 포위까지 하고 장기전을 펼쳤으나 오스트리아군,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 지원군의 협공으로 결국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 정복은 실패로 돌아간다.
2차 비엔나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이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파면서 화약을 폭파시켰는데, 어느 제빵사가 지하실에 밀가루를 가지러 갔다가 폭파음을 듣고 수비군에 알려 오스만의 갱도 건설을 좌절시켰고, 그 제빵사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영예로운 문장을 받게 되어 문 앞에 내 걸게 되었다. 이 제빵사는 오스만 군을 축출한 영광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투르크의 상징인 초승달(crescent) 모양의 빵을 만들었는데, 이 빵이 크루아상(croissant)의 유래라고 한다.
이 전쟁에서 진 오스만 투르크군이 퇴각하면서 커피자루를 놓고 가서, 이 커피가 비엔나커피가 되고, 비엔나커피가 서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전파된 과자, 마카롱
마카롱은 프랑스가 본산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전해졌고, 그 후로 크루아상과 같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프랑스의 대표 디저트가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16세기 중반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탈리아 피렌체 가문의 귀족 카트린 드 프란치스가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에게 시집을 가면서 준비한 혼수품에 마카롱이 있었다는 것이 유력설이다. 이 결혼식 후에 마카롱은 프랑스 다양한 지방으로 전해졌고, 지역별로 각각 다른 맛과 모양으로 발전한다.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전해질 때는 동그란 모양이 과자였으나, 프랑스의 유명 제과점 '라뒤레(Laduree)'에서 머랭으로 만든 마카롱 2개를 크림으로 샌드처럼 만든 형태의 마카롱을 만들면서 지금은 마카롱 하면 다들 샌드 형태의 형형색색 마카롱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프랑스의 문화적 유연함
프랑스가 외부에서 받아들여 현지화에 성공한 사례가 비단 크루아상과 마카롱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단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피카소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은 다들 프랑스 몽마르뜨 언덕 어느 곳에서 작품 활동에 열을 올렸을 법 한데, 이 또한 프랑스의 문화적 유연함의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문화 전문가가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는 분명 자신의 것을 발전시키면서도, 다른 나라, 다른 문화의 유입을 배척하지 않는 유연함 덕분이 지금은 적어도 문화 대국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전 세계의 패션, 미술 전공자들이 파리로 파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