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F Sep 13. 2022

퇴사 후 한 달,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20대 공공기관 대리의 퇴사일지 10


벌써 퇴사일지를 10편째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퇴사 다음날, 집 근처 카페로 위장 출근을 하면서 첫 글을 작성했었는데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퇴사한 지 한 달이 넘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빠르면서도, 느리다는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벌써 한 달이나 됐다고?"와 "이렇게 익숙한데 한 달 밖에 안됐다고?"의 공존. 역시 사람의 몸은 일하기 위하여 디자인된 것은 아닌 것 같다. 2족 보행을 하는 순간, 노동과는 멀어진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의자에 앉음으로 인하여 사무직은 4족을 갖게 된다. 진화에 역행하는 4족으로 인하여 직장인들의 몸이 삐걱대기 시작하자, 무시무시한 현대사회는 스탠딩 책상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나의 한 달 된 퇴사를 기념하는 글을 쓰려했는데 어쩌다가 저런 논의까지 흘러온 건지 알 수 없다. 각설하고, 놀랍게도 퇴사 이후의 생활이 아무렇지도 않다.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무탈하다'와 동의어이다.


퇴사하기 전에도 늘, 항상! 회사를 벗어나서 무직 상태가 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당시에는 아무런 대안 없이 퇴사하면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하여 너무나도 힘들 것만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3년 동안 이 회사의 대안이 나타날 때까지 퇴사를 미뤘던 것이다.


최근에 또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왔다.


그런데 막상 백수 생활을 해보니 아무렇지도 않다. 나의 미래가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보다 선명하게 그려진다. 회사를 다니면서 40대가 되어도, 50대가 되어도 여기서 근무할 수 있을지 상상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백수인 지금은 꿈의 반경이 커져서 여러 갈래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상상하고 꿈꾸는 게 삶의 큰 원동력인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변화이다.


무소속의 스트레스보다 회사 스트레스가 백배는 심하다는 걸 몰랐다. 내 미래는 내 거니까 고민도 당연히 나의 몫이다.


그러나 회사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는 사회생활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이다. 한 사람 퇴사했다고, 휴가 쓴다고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인력을 조금 쓰는 회사가 문제 아닌가? 그런 고민을 노동자가 몇 개 안 되는 휴가를 쓸 때마다 해야 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 공백을 방지할 인프라는 갖추고 회사를 운영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세탁기도 아니고... 부품 하나 없다고 기계가 안 돌아가는 것처럼 만들어진 시스템이 문제 아닌가?


쓰다 보니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 회사 소속일 때는 공개적으로 비효율성을 비난하지 못했으니, 퇴사자에게 키보드가 쥐어진 이상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해 보겠다.


타지에서 만난 예쁜 카페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어떠한 자본주의의 화신이 내 머릿속에 눌러앉았던 것만 같다. "사회에 나가면 꼭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 지내야 해!"라고 누군가 속삭이기라도 했던 것만 같다. 한 발자국만 나와보면 이렇게 가능성이 충만한 세상인데 말이다. 물론, 누누이 말해왔듯이 나도 언젠가는 노동으로 복귀하여야 한다. 하지만 일단 현재는 무소속의 백수이니까, 한번 마구 노동의 비효율성을 논의해보았다.  아직 일용할 돈이 있어서 이렇게 기업을 할퀼 기회가 있는 거일 수도 있다. 빈털터리가 되면 또 자본주의의 화신에게 세뇌될 수도 있겠지.


아무튼, 현재 굉장히 충만한 삶을 보내고 있다. 도전해보고 싶은 일들에 뛰어들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하루하루가 다채롭다. 생각보다 퇴사하는 거 별거 아니잖아! 이렇게 한 템포 쉬어가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조정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예전에는 오랜 시간 이직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고민과 회의의 감정이 문득문득 올라왔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주위를 자주 둘러보는 사람이기에 시행착오를 겪었어야 했던 것 같다. 그때 안 겪었다면, 나중에 후폭풍처럼 몰려왔으리라. 미리 예방주사 한 방 거하게 맞은 셈 치기로 했다.


보스턴 느낌. 아닐 수 있음. 안 가봄.


퇴사 한 달 후, 작고 소중했던 월급과 탈주를 막아주던 고용안정성이 적어도 나에겐 하등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르겠다, 월급이 크고 소중했다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었겠지.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이 나와 굉장히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내 가치를 증명해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하는 업무가 타인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또 열심히 나를 갈고닦아야겠지.


이 글은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겠다. 거부해도 어쩔 수 없다. 한 번 읽어주시라...


치킨 와플과 오렌지주스


이전 09화 가족 몰래 했던 퇴사를 들켜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