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공공기관 대리의 퇴사일지 06
어느덧 퇴사 2주째 되는 날, 증권사에서 알림톡이 왔다.
'퇴직금 입금 알림'
IRP 계좌를 제출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예상했던 연말보다 이르게 사직서를 던졌기에, 퇴직금 액수가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추석 상여도 포함되지 않을 테고, 이래저래 적은 금액이 들어올 거라 예측했다. 하지만 백수에게는 한 푼도 아쉬운 법이기에, 서둘러 알림을 확인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큰 금액이 입금된 것 아닌가. 원래 퇴직금은 증권사에 넣어두고 투자금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IRP 계좌도 가지고 있던 증권사 것으로 제출했다. 그런데 예상을 상회하는 금액이 입금되자, '돈 잘 쓰는 사람'의 마음은 마구 요동쳤다.
생각보다 많이 들어온 퇴직금, 어떻게 써야 잘 썼다는 소리를 들을까?
고생한 나를 위해 어느 정도는 써도 되지 않을까?
Money Money 해도 금융 치료가 최고라는데!
일단 퇴직금을 해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퇴직 계약을 해지하려면 지점까지 가야 한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귀찮아졌다. 퇴직금은 비상금으로 넣어두기로 했다. 만약 경기가 더욱 안 좋아진다면, 그때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요즘 같이 불확실성이 만연한 시대에는 항상 자금을 확보해두어야 하니까. 그래서 퇴직금은 IRP 계좌에 묶어두고, 그만큼의 돈을 여유자금에서 융통하기로 했다. 여유자금이라고 적었지만, 사실 여유롭지 않다.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쓰는 여유^^자금.
일단 나를 위해 돈을 쓰기로 결정했으니, 사용처를 생각해보았다. 차를 한 대 계약할까 생각도 했는데, 향후 3년은 차를 몰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엄청난 장롱면허이다.
그렇다면 큰돈이 생길 때 쓸 곳은 뻔하다. 그건 바로 여행!
최근에 해외에 가고 싶어서 난리가 났었는데, 마침 기회가 온 거다. 19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해외를 다녀온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더더욱이 유럽은 6년 만이다. 항상 겨울 유럽을 갔어서, 내년 여름에나 다시 가려고 했는데 참을 수 없어졌다. 일단 가고, 갈 수 있으면 또 가지 뭐.
일단 도착지는 런던으로 정했다. 목적은 첫째로는 해리포터 스튜디오이고, 둘째로는 뮤지컬이다. 런던에는 거의 10년 전에 방문했었는데, 그때는 박물관과 명소 위주로 구경했었다. 이번엔 덕후의 마음을 설레게 할 목적지들로 가득 채워야지! 셜록, 패딩턴, 토트넘, 노팅힐, 전부 구경해야겠다. 그래서 여유롭게 7박을 하기로 했다.
다음 행선지 후보는 포르투였다. 리스본에 묵을 때, 그곳의 한국인 모두 포르투가 더 좋다고 입을 모아 말했었다. 나는 리스본도 넘치게 좋았는데, 포르투는 어느 정도로 좋을지 궁금했다. 해리포터의 발상지라는 렐루 서점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포르투는 아무래도 작은 도시라서 항공편이 너무 애매했다.
결국, 정해진 다음 행선지는 동유럽 3국이다. 동유럽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무척이나 기대된다. 야경이 예쁜 도시들이니까, 해가 일찍 져도 행복하겠지.
프라하에선 크리스마스 마켓의 굴뚝빵을 먹고 체코 맥주를 마실 거다. 가넷 목걸이도 사 와야지. 근교 마을들도 유명하니까 당일치기를 다녀와도 좋겠다. 부다페스트는 온천이 가장 큰 목적이다. 요시고의 사진에도 등장한 부다페스트의 온천에 다녀와야지. 겨울을 맞아 설치되는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도 타야겠다. 비엔나는 무려 6박이다.(프라하와 부다페스트는 모두 4박.) 비엔나에는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해 유명한 그림들이 많으니까, 미술관 구경을 실컷 해야겠다. 음악의 고장이니 오르간 연주회도 참석하고, 궁전들도 구경해야지.
추진력이 또 내 장점이다. 생각했으면, 바로 항공편을 찾아봐야 한다. 항공권 가격이 천정부지라 하더니, 진실이더이다. 6년 전에 똑같이 대한항공 직항 끊었을 때 85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162만 원이다.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차이가 너무 심하다. 코로나가 비행기 값을 2배로 올려놓았나 보다. 하지만 이제는 직항을 못 잃겠다. 예전에 홍콩 환승으로 유럽에 갔다가 너덜너덜해져서 도착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거의 열 살이 많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다.
무소의 뿔 같은 사람은 숙소도 다 예약해버렸다. 괜찮은 한인민박은 빠르게 매진되기에 미리 예약해두어야 한다. 나는 유럽의 호텔, 한인민박, 호스텔을 모두 경험해보았다. 호텔은 혼자 가면 무섭다. 복도도 무섭고, 방도 괜히 무섭다. 호스텔은 다국적이라서 그런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여러모로 한인민박이 최선이다. 조식도 한식으로 제공하고, 정보도 공유하고, 동행도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발생한 숙박비는 벌써 103만 원이다.
비행기와 숙박비로만 265만 원이 결제됐다. 추가로 런던에서 프라하로 가는 비행기도 예약해야 하고, 동유럽 간 기차도 예약해야 한다. 그럼 벌써 기본비로 300만 원이 플렉스 된다. 백수도 됐으니 연회비 낮은 카드로 바꾸려 했는데, 그냥 지금 카드를 계속 써야겠다.
퇴직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와서, 얼떨결에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얼떨결에 왕부자가 되어야지!
아무튼 유럽에 가서도 부자처럼 살아야 하니까 경비가 엄청날 거다. 그런데 아직도 6년 전 유럽 여행 기억을 꺼내 먹으니까, 꽤나 괜찮은 투자일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예전에 누군가 말해줬었다. 나중이 되면 추억을 먹고살게 되니까, 경험을 많이 쌓고 살라고. 그런 면에서 난 뒤지지 않는다. 일단 해보는 성격 덕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경험치, 이번에 한 칸을 더 쌓아보려고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썼지만, 갑자기 다른 사용처가 번뜩 생각나서 여행을 접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뜸 돌아오는 날을 더 연장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17박 18일이던 여행이 22박 23일로 늘었으니 말이다. 되도록 이번 겨울을 유럽에서 즐거이 보내는 쪽으로 바라보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