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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F Aug 17. 2022

롱원피스 입고 바다수영 <퇴사자 in 제주도>

29살 공공기관 대리의 퇴사일지 05


우연히 발견한 바다에
치렁치렁 롱원피스 차림 그대로
숨 참고 풍덩 다이브-!

이렇게 살기로 했다.
심히 따지지 않고 사리지 않고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기로.



아침에 일어났는데 숙소 앞의 청귤 밭이 푸르렀다. 구름이 살풋 낀 날씨로 바람이 잘게 불기에, 비가 올 듯하였다. 막연히 바다 수영을 하지 못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총장 116cm의 롱원피스를 입은 채 숙소를 나섰다.


첫 번째 장소, 도렐 본점.

예전부터 유명해서 지점이 여럿 있는 카페지만, 가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다. 너티 클라우드 한 잔에 까눌레 하나를 먹고 정신을 깨웠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뚜벅이로 다니려면 다량의 카페인이 필요하다.


두 번째 장소, 성산일출봉.

카페에서 나와 성산일출봉을 향해 걸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리에 뒤돌아보니 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말들에게 인도를 양보하고 풀숲을 따라 걸었다. 무서워서 그런 것, 맞다.


바다에 풍덩 들어가있는 상태


세 번째 장소, 세기알해변.

버스에 몸을 싣고 카카오맵을 구경해보았다. 가는 길에 세기알해변이 있는 것 아닌가. 이번 제주여행에선 수영을 하고 싶어서 찾아놨던 바다였다. 판포포구와 함께 스노클링 명소라는 곳. 일단 그 정류장에 내렸다.


원래는 사진 찍고 발만 담가보려 했다. 그러기엔 너무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마음대로 살기로 한 거 아닌가?

대책 없이 사직서를 던질 때부터 나는 마음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거였다. 옷이 젖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수영복 하나  입었다고 주저하기엔  계절과 시간이 아까웠다. 이런 바다를 보고도 눈으로만 감상하는 , 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직무 .

조심스럽게 해변에 가방을 내려두고 원피스를 살짝 걷은 채로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엔 무릎까지만, 그다음은 허벅지까지만, 그다음엔 그냥 풍덩-!


처음엔 핸드폰을 들고 들어갔다가, 물이 익숙해지자 핸드폰마저 두고 맨몸으로 들어왔다. 무릎을 구부려 몸을 둥글게 안고 바다 위에 둥둥 떴다. 구름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과 시원하다가 따뜻하다가 하는 물살을 느끼고 있으니 행복했다.


바다에서 나와보니 덩그러니 날 기다리던 가방


한참을 바다에서 유영하다가 물을 뚝뚝 흘리며 나왔다. 어느 가족 옆에 조심히 놔둔 가방 앞에서 롱원피스 물기를 짜내고 탁탁 펴줬다. 해변 입구에서 젤리슈즈에 물을 뿌려 모래를 털어냈다. 여전히 옷엔 물기가 가득하지만, 그냥 걸어 나왔다.


옷이야 마르는 건데, 뭐가 걱정이람. 작은 걱정들을 덜어내면 조금 더 행복해진다.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다닥다닥 붙는 고민들도 사실 별거 아니다.


햇빛에 말려보는 젤리슈즈


제주도엔 버스정류장마다 송풍기가 비치되어 있다. 송풍기를 틀고 옷과 신발을 말려주었다. 정류장까지 해를 보며 걸어왔더니, 그사이 꽤나 말라있었다.


역시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일단 해보는 게 백배 낫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 후회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끔 가다 후회했던 건, 무언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바다에 걸어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바다수영에 대한 열망이 계속 남아 있었겠지. 지금은 아주 후련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기로 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되는 거지. 심히 고민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여름에 제주도까지 와서 옷 걱정하느라 바다도 못 들어가는 건 너무 멋없잖아.



버스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국물이 먹고 싶어 져서 고등어 메밀 집을 예약했다. 마지막 그릇이었나 보다. 예약하자마자 대기가 마감됐다.

수영해서 잔뜩 지친 몸으로 들이킨 국물은 원기를 보충해주기에 충분했다. 고소한 고등어회까지 집어먹고 숙소로 향했다.


이제 뒷정리 시간이다. 해수는 옷감을 삭게 하기에 꼭 빨래를 해주어야 한다. 샤워도 하고 빨래도 했더니 팔이 너덜너덜해졌다. 새 옷을 입고 조금 누워있다가 다시 숙소를 나섰다.




카페에서 글을 좀 쓰다가, 찾아두었던 와인바로 왔다. 혼자 여행의 밤은 무언가 허전하기에 알코올로 채워주어야 한다. 한 번에 기분을 올려주기 위해 도수가 20도라는 포티 와인을 시켰다. 메뉴판에 포티 와인은 아이스크림을 시켜야 한다고 쓰여있길래 그것도 추가했다. 이런 말은 아주 잘 듣는다.


이제 메뉴판을 치워준다는 점원을, 호기롭게도 더 마실 거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는 술이 약했다. 와인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애꿎은 아이스크림만 싹싹 긁어먹었다. 괜한 메뉴판만 뻘쭘해진 상황. 그래도 기본 안주 크래커를 먹으며 꿋꿋하게 한 잔을 끝냈다.



조용히 메뉴판을 덮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너무 늦으면 무서우니까 9시가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은 친구들이 온다. 백수는 공항에 가서 제주도민처럼 그들을 맞이할 예정이다. 여행이 끝나면 또 일상적인 고민들이 찾아오겠지만, 일단 잔뜩 즐겨보겠다. 제주 바람을 맞으며 방어력을 키워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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