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공공기관 대리의 퇴사 일지 04
퇴사하면 다들 제주도 여행 가더라고요?
마음만은 '한 달 살이' 지만, 현실은 위장 출근해야 하는 뚜벅이.
그래서 친구들보다 이틀 먼저! 제주도로 떠났다.
수요일에 제주도로 떠나는 직장인? 흔치 않다. 하지만 나는 백수니까, 자체 휴가를 내면 된다.
직장인 때는 캐리어 소리로 회사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오후 비행기를 타려면, 캐리어를 근처 물품보관함에 맡겨두고 다녔다. 아니면 아예 일찍 출근하든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할 수 있지만, 다 경험에서 우러난 행동이다. 어디 간다고 얘기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되면 "누구누구 대리는 돈이 많은가 봐~ 아니면 여유롭나? 잘 놀러 다니네~"라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자유인이니까, 날 막을 사람은 없다. 자체 휴가를 내고 늦잠을 자다가 바로 공항으로 왔다.
제주도를 갈 땐, 항상 김포공항에서 롯데리아를 먹는다. 여행이 실감 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심장이 뿜 뿜 뛴다! 역시 김포공항 롯리를 먹었더니 '제주도 여행'이 인식된 건가. 아니면 단순히 아메리카노의 카페인으로 인해 설레는 거일 수도.
어찌 됐든 나의 어깨와 광대는 또 하늘로 치솟았다. 제주로 떠나서 직장인의 삶은 버리고, 새로운 기운을 담아와야지.
호기롭게 창가 자리를 차지했는데, 호우경보가 뜬 서울의 하늘은 이랬다. 제주도는 맑다고 하던데, 과연?
맑다 못해 뜨거웠던 제주도.
뚜벅이는 바로 서귀포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마중 나와주셨다. 이 분이 하는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3년 전에 회사 동기들과 묵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때도 동기에게 퇴사하고 싶다고 염불을 외웠었기 때문이다.
햇살이 차르르 들어오는 테라스에서 시리얼을 먹으며 얘기했었다. 포인트는 그 동기는 이미 이직했었다는 사실.
나도 어디든 여기 말고 다른 곳을 가고 싶다며, 그냥 퇴사하고 공부하는 건 어떻냐며 쫑알쫑알.
생각해보면, 그 해부터 총괄 업무를 맡았으니 마음이 부서져 있었을 때다.
연관 있는 숙소를 퇴사 이후 오게 되니, 감회가 무척이나 새로웠다. 이곳은 매일 영화를 틀어준다. 오늘 밤 상영되는 영화가 슬펐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핑계를 하나 붙잡고 울고 싶었나 보다.
걱정할 친구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퇴사자니까 슬픔의 눈물은 아니다!
드디어 그곳을 떠나서 시원한 마음, 과거의 내가 애틋한 마음, 앞으로의 발걸음이 설레면서 걱정되는 마음을 모아 모아서 눈물에 흘려보내고 싶었나 보다.
어떤 때는 한 번 울고 나면 마음이 뻥 뚫리듯이 후련해지니까. 마음 청소를 하고 싶었던 거지.
바람과 달리, 경쾌한 뮤지컬 영화이 상영되었다. 다행히도 보고 나서 내 마음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노래들을 입모양으로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내일의 플레이리스트가 정해지면서, 나는 또 내일을 기대하게 됐다. 어느 정도 마음이 청소되어 가는 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