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공공기관 대리의 퇴사일지 02
백수 됐으니 먹고 자고 노는 거 아니냐고요?
매일매일 카페로, 쇼핑몰로, 영화관으로, 여행지로 위장 출근하는 퇴사자
나에겐 미루고 미루던 퇴사를 한 것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이직도 아니고 로또도 아닌 명분 없는 퇴사이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지만, 고민과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같다. 한 사람이 3-4개만 고민해도 가족에게 말하면 10개가 넘는 고민이 더 생기는 거다. 피차 행복하기 위해서 퇴사를 알리는 것은 조금 미루도록 한다.
그래서 나에겐 미션이 하나 생겼다. 우편으로 오는 4대 보험 자격상실 통지서를 쟁취하라.
퇴사 첫날엔 아이패드, 키보드, 충전기, 소설책을 잔뜩 챙겨서 카페로 왔다. 본래 출근시간에 맞춰서 마치 출근하듯이 집을 나섰다. 퇴사하면 기분이 날뛰듯이 좋을 것 같았지만, 침울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다. 아직 첫날이라 그런 걸까.
하지만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어깨에 마구 얹힌 돌덩이들이 사라진 것을 보니 앞으로 행복해질 것 같다. 일단 회사 생활에서는 없던 기대감을 찾게 되었다. 점심 메뉴를 기대하고, 오늘은 어디로 위장 출근을 할지 기대하는 것.
회사 점심시간에는 동료들의 돌림노래 같은 일하기 싫다는 소리가 듣기 힘들었다. 점심 메뉴도 한정적이어서 항상 아쉬웠다. 그런데 이제 내가 원하는 메뉴를 골라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걸 보면서 먹을 수 있다.
거창한 메뉴는 아니라 해도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꼬꼬무 보면서 먹고, 책 읽으면서 먹고. 늘 복작거리던 카페를 평일 낮에 전세 내보기도 하였다. 소소하지만, 사람은 원래 소소한 행복을 먹고 자라는 거 아니겠는가.
출근이 걱정되어 마시지 못했던 술도 내 기준에선 양껏 마셨다. 자몽에 이슬도 한 병을 털어보고, 별빛 청하도 마셔보고. 내일 얼굴이 부을까, 속이 아플까, 졸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어서 행복했다.
위장 출근을 핑계 삼아 날이 좋으면 훌쩍 나들이를 떠나고, 날이 좋지 않으면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책을 봤다. 오랜만에 전시회도 가고, 현생에 치여서 보지 못했던 소설들도 읽었다. 회사생활을 할 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숏폼이나 20분 내외의 짧고 직관적인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긴 호흡의 드라마를 차분하게 보고, 영화를 음미할 수 있다!
이런 행위들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걸 보면 사람은 일하기 위해 설계된 존재가 아닌 것 같다. 9to6 직장인은 짬을 내야만 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점심시간에 나와서 날이 좋은 걸 보며 서글펐던 기억이 난다. 이런 볕 좋은 날과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하며 사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었다.
지금 이 여유도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간이 청춘의 마지막 일탈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곧 다시 생업에 뛰어들어야 할 테고 평생 공부하게 되겠지. 그러니 갓 백수 라이프를 마음껏 즐기고 공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