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팔이의 휴가

영월

by 파로암


여름과 겨울 일주일씩 휴가를 가진다.

대개 학원의 휴가는 하루이틀이지만

일주일 통으로 놀아! 쉬어!

불만 있음 죄송합니다요!




휴가라도 별다른 계획이 없었는데 문득 영월로 떠나게 되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설렌다.




창원에서 강원도 내륙 쪽으로 가는 교통편이 전무했는데 현수막으로 창원-고한사북 노선이 신설됐다는 걸 보았다. 개통된 지 9일 차. 하루 두 번 운행. 버스에 승객이 나밖에 없었다. 기사아저씨 옆에서 조잘대며 얻은 정보에 따르면 강원랜드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 창원. 마산. 울산을 버스 4대로 돌리는 노선이라고 한다. 태백인지 정선인지의 지원도 있다고 한다. 아직 손님이 거의 없어서 공차로 왔다 갔다 하고 있지만 추석 뒤로는 많지 않을까.. 기대하고 계신다고. 나처럼 순수여행목적 승객은 처음 본다고 하셨다.


강원랜드.. 도박의 세계는 어떨지 궁금한데 흉흉한 이야기도 많고 별거 없다는 경험자도 있어서 어쨌든 아직 미지의 세계다. 나처럼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중독될 일이 없다고 하지만...



<속눈썹은 내 속눈썹이 아니고 붙인 것도 아니고 스노우가 붙인 겁니다>


인스타로 알게 된 카페에 드디어 오게 되었다. 사실 버스터미널에서 바로 영월로 갈 수도 있었고 그게 더 편한데 사북역 앞에 있는 이 카페에 오기 위해 택시를 탔다. 얼마 안 되는 거리라 걸어오려고 했는데 도로사정을 전혀 몰라서 치어 죽을까 봐. 택시로 오면서 보니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인도가 확보되어 있었다.


가내수공업자라서 새로운 인간관계 맺기가 쉽지 않은데 SNS는 이렇게 연을 만들어준다. 사북카페사장님과 창원동네수학팔이가 인스타 아니면 어떻게 알 거야. 나는 SNS의 순기능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다. 헤비유저니까.


강원랜드가 산 위로 보였고 험악한 현수막도 걸려있었다. 도박하다 인생 말아먹은 자의 유족이 피를 토하며 걸어둔 듯한 현수막. 아유 세상에.



제비가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인스타로 봤었는데 이미 다 커서 강남 가고 없단다.

박 씨 물어와서 떨궈라.

호사장님 편하게.






연탄재 전용 수거함은 처음 봤다.

연탄재는 없고 쓰레기가 한가득 있긴 했지만 지금은 연탄 땔 때가 아니니께.

사북은 정말 작은 동네여서 십분 정도 걸으니 한 바퀴를 돌 수 있었다.


콤프라는 단어를 처음 봐서 뭘까 궁금해했다. 지역화폐 같은데.


사북에서 영월로 가는 기차를 탄다.

기차가 도착하자 손주와 딸을 맞아주는 할머니.

아들에게 돈을 보내라는 전화를 하더니 전화 끊고서는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며 웃는 할머니

내 그림을 구경하며 감탄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기차의 내 자리를 찾아가자 옆자리에 잘생긴 청년이 앉아있었다.

청년은 무심하게 폰을 보고 있다가

이내 잠들었는데 고개가 심하게 꺾였다.

고개를 바로 해주고 싶은 충동을 심하게 느꼈으나

함부로 청년의 몸에 손을 대면 오해를 살 수 있으므로 꾹 참았다.

내가 내릴 때도 청년은 깊이 고개가 꺾여있었다.






영월에 도착했다.

역에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식당으로 들어가 다슬기비빔밥을 먹었다.

다슬기맛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허겁지겁 모든 반찬과 국과 비빔밥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메뉴 두 개 시킬걸.





숙소는 모텔 캘리포니아.

예쁘다.

침대방 5만 원

온돌방 4만 원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어깨를 돌리며 청령포로 간다.

아유 가방 무거웠어라.





선샤인이 너무나 강력했다

동강대교가 동강동강 동강동강

머릿속에 계속 동강동강이 맴돈다.





생수를 가져가라는 영월군.

냉장고 안은 막 차갑진 않았지만 시원했다.

나는 이미 1리터의 얼음물을 챙겨 왔기 때문에 생수에 손대지 않았다.





이 병들은 영월의 삶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들 약 빨면서 일하는겨.

나처럼 몸이 못 배겨낼 만큼 카페인. 타우린 도핑하면서 일하면

대동맥도 터지고~

요단강에 발 담그고~


적당히 하고 싶지만 적당히 할 수 없는 일일 테지.









땀을 좔좔 흘리며 청령포에 거의 다 왔다.


절벽에 만들어진 이 구조물은 되게 이상했다.

바위를 깎은 건지 바위에 붙인 건지 뭐든 되게 힘들었을 것 같은데

문 안쪽에 그려진 그림도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알림판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청령포에 도착해서 단종의 비애를 느껴보려 했으나

너무 덥고 힘들어서 벤치에 뻗어있다가 왔다.


단종이고 나발이고 내부터 살자.



가스파드가 나를 지켜줄 거야

비가 와도 지켜주고

해가 떠도 지켜주고











모텔 캘리포니아에서의 밤

별이 뜬 게 보였지만 너무 깜깜해서 무서워서 못 나갔다.

강원도 귀신은 초면이라서...







라디오스타박물관

타락천사에 나온 주크박스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트는 법이 적혀있었으나 틀 줄을 몰라서 그리기만 그렸다.

카세트 트는 법을 모르는 것들을 껄껄 비웃다가

주크박스를 못 트는 나 자신을 개한심 해했다.



겸손하자 나 자신.








홀린 듯이 들어간 한식뷔페 미자식당.

직원들이 활기차고 유쾌하고 힘차게 일하고 있었다.

잔뜩 음식을 담아와서 한 톨도 안 남기고 다 먹었다.

어른 9000원


리치 3개를 까먹고 나자 배가 딱 맞게 찼다.







창절서원

단종의 복위를 행하려다 세조에게 목을 주르륵 따인 사육신과

목숨 걸고 단종의 시신수습을 했던 엄홍도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개를 안숙이면 들어갈 수가 없는 작은 문.


영월에 와서 새롭게 알게 된 인물이 엄홍도인데

단종시신수습해서 대를 이어 묘의 좌표비밀을 지키게 한 인물이다.

숙종이 엄홍도의 후손을 찾아내어 단종묘의 위치를 알아서 종묘에도 모시고 했다는데

이거 드라마 도깨비 아잉가


단종보다 엄홍도가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다










계단을 따라 흐르는 물에 너무 들어가고 싶었으나 돌담을 기어올라올 자신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다.

손잡아줄 누군가 있었으면 내려갔을 텐데.







혼자 하는 여행은 편하고 불안하고

자유롭고 외롭다.










단종역사관에서 단종의 즙을 관람했다.

어유 얼마나 짜댔는지...

17세에 승하하였으니 업적이 있을 수도 없지만

그 억울한 죽음 탓에 과하게 신격화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단종의 묘를 지키고 서있는 신하들의 석상도 애처롭다

죽어서까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종.


주체성과 자율성과 독립성은 어디에 있는 거지


어린 17세의 왕에게 절하기를 거부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나보다 540살 연상이다.









그리고 동강사진박물관으로 걸었다

온 영월에 국제사진전 현수막이 걸려있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실내작품들은 찬찬히 돌아볼 수 있었으나

실외작품은 대충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좀 살자


라테와 쿠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카페인 도핑이 금지된 몸이라 의지할 것은 오로지 당밖에 없어.







영월에 관한 자료를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다


단종

돔강

그리고 김삿갓


김삿갓은

삼족을 멸해야 할 때 멸하지 못한 후손이다

어린아이는 죄가 없긴 한데

지금 이스라엘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삼족을 멸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걸어서 하는 여행이라

김삿갓 관련 여행지는 갈 수 없었다

근데 삿갓 쓰고 방랑할 거면 장가는 왜 가

결혼해서 애 낳고 돌아다녔다는데서 화났다


가정은 나몰라라 하고 돌아다닌 것들이

위인 중에 제법 있다 안중근이라든가


정말 여자한테 씨만 뿌려놓고 나돌아 다닌 건데

안중근이 한 일은 또 대단하니까

김삿갓이 쓴 글은 또 대단하니까

뭐라 말도 못 하고


떼잉










목욕탕에 갔다.

목욕용품이 하나도 없어서 녹차 때비누(5000원)를 사서

머리와 몸을 다 씻었다.

그리고 비누를 놔두고 와버렸다.


내 때비누...

누군가의 때라도 벗겨주길...











나는 빨래터를 좋아한다.

남해상주의 빨래터

낙안읍성의 빨래터

들은 물이 말라버렸는데

영월의 백월 빨래터에는 차가운 물이 좔좔좔 풍부하게 흐른다.

발에 물을 담그고

물에 발을 담그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어르신이 말통 두 개에 물을 퍼담아 가셨다.

나를 힐끔힐끔 보셨는데 위험인자로 분류된 것 같진 않다.







중앙시장의 메밀전병과 배추전

개당 2000원 맛있어서 포장했다

쪼매난 물도 주셨다








서부시장의 올챙이국수와 수수부꾸미

올챙이국수가 차가운 줄 몰랐고

수수부꾸미가 떡인 줄 몰랐다.

맛있어서 포장했다.








카페 스몰토크에서 영월에서의 마지막 먹이를 먹었다.

설탕을 바삭바삭 부셔서 먹는 디카페인 카푸치노와 말차푸딩


영월에서는 스몰토크가 별로 없었다

다들 시원한 차 타고 이동하지

소금물 쏟아가며 걷지 않기 때문이다




걷는 여행자를 만나긴 했는데 그쪽도 나도

몹시 너덜거려서 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걷고 싶은 만큼 걷고

그리고 싶은 만큼 그렸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형태를 찾았다.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지역들이 가득한 것이 좋다













옥수수를 나눠주는 영월의 거리

역시 강원도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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