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인식

by 파로암

중1에 올라가는 아이들을 잔뜩 데리고 공부방을 시작했다. 씨앗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덧 중3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고등수학도 준비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학원을 권해봤지만 이것들이 자연스럽게 나한테서 사겠다고 버텼다.


기초연산 문제집과 개념원리와 유형서를 닥치는 대로 샀다. 교재로 쓸 책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단 문제를 풀어보고 개념이 어떻게 쓰이는지 몸에 익히고 어떤 유형이 있는지 그 단원에 있는 모든 유형을 풀어보았다. 개념의 유도과정을 몇 번이고 다시 써보고 단계마다 왜 그렇게 되는지를 찾아보았다. 답지를 보고 고민하다가 유명강사의 강의를 찾아보고 다시 교재를 3번 이상 풀어보았다. 의심스러우면 5번 풀었다. 고등수학 스터디에 들어가 선생님들과 같이 공부했다. 그 학기가 끝나고 세어보니 문제집 13권을 그렇게 풀었다. 그래도 수업을 하고 나면 아직 실력이 모자란 듯했다.


11시에 수업이 끝나고 채점까지 끝내고 나면 1시가 가까웠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 4시~5시까지 공부가 이어졌다. 당장 내일 수업을 해야 할 부분인데 몸에 익은 느낌이 들지 않으면 불안했다. 3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집안일을 해치우고 다시 앉아 공부했다. 중추신경을 활설화 시키는 약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미래의 에너지를 끌어다 썼다.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잠깐 책상 위에 엎드려 있다가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아이들이 웅성이는 소리에 잠에서 화들짝 깨서 아로나민 골드와 흑마늘즙을 들이켜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쉬운 질문에 대한 답을 즉각 할 수 없었다. 무서워졌다. 부족한 수면과 스트레스 때문인 건 인지했지만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가르쳐야 할 개념과 문제가 산처럼 쌓여서 새벽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번 풀었던 문제가 의심스러워 다시 풀어보려고 프린트기를 돌리고 있었다.

문득 눈물이 쏟아졌다. 나 힘들었네. 지금도 힘드네. 복사된 문제 위에 눈물을 쏟으면서 샤프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 이렇게 푸는 거지. 이렇게 설명하면 쉽겠지. 이 흐름이 맞는 거지. 엉엉.


그렇게 월화수목 주 4일 돌아가고 나면 금요일에는 잠을 잤다. 그리고 일요일에 일어났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 1박 2일 할 때쯤까지 자고 나면 부족한 수면이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부터 잠 안 자고 공부했다. 그 생활이 반 년쯤 이어지고 몸은 급격히 나빠졌다. 여기가 한계라는 생각을 매일 매 순간 했다. 한의원을 찾아갔다.


머리를 혹사시키고 계신데요

네... 해야 할 공부가 있어서요.

무슨 공부요?

... 고등수학...


유명수학강사가 수능수학은 타고난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면 1등급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화가 몹시 났다. 그 노력이라는 것이 수학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이라든가 생활이라든가) 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수학을 그나마 잘하고 팔기까지 하는 내가 이런데 평범한 아이들이 이런 노력이 가능하다고? 닥쳐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지금 이 생활을 계속하면 몸에 염증이 생길 거예요.

염증은 항생제로 없앨 수 있잖아요.

... 그 염증은 암이 될 겁니다.


이렇게 공부해서 나는 간당간당한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노력에 대한 과한 신뢰를 싫어하게 되었다. 타고난 재능을 벗어난 노력은 생명을 갉아먹는다. 나의 수학에 대한 재능이 이까지인 것이 무척 괴로웠다.


그 힘들었던 공부를 토대로 고등수학을 몇 년 돌았더니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중3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서 공부방 운영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고등수학을 그렇게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타고난 재능이 풍부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스스로 힘들었다. 이것보다 힘든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정말 힘든데...


한계까지 나를 몰아붙여야 인식이 가능하고 거기서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인정이 가능하다.


한번 가봤던 한계가 너무 혹독해서 이제는 강도는 약하게 시간을 충분히 들이는 쪽으로 확고히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그게 맞다. 생명을 지키고 과정을 즐기는 그게 맞다. 내가 맞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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