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수업을 시작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함께 그림을 시작했던 5명의 멤버 중 3명이 남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이지만 3년쯤 되니 뭔가 쌓이기 시작한다. 그림실력과 사람에 대한 감정이.
그림실력이 점차 쌓여간다고 느낀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림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같은 곳을 그려보면 예전의 어색한 기운이 제법 빠져나갔다. 딱히 실력발전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얻은 게 있다는 것이 기쁘다.
동료의 그림이 발전한 것을 느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내 오른쪽 짝은 나의 빠른 속도에 따라갈 수가 없다며 늘 자신이 그린 그림보고 "이것이 그림인가"라고 하신다. 그러나 배움이 쌓여가면서 색깔을 빛에 따라 적절히 넣고 빼는 것에 익숙해지시면서 고유의 화풍을 유지하면서도 기술적으로 발전한 그림을 매 수업시간마다 보여주신다. 특히 인물을 넣은 그림이 무척 재미있어서 어떤 걸 그릴지 고민하실 때 인물사진을 추천한다.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둥했던 인물이 비율이 맞아가면서 선생님의 자신감도 올라가시는 듯 “어이고 이쪽은 따라갈 수가 없다” 의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그에 반해 왼쪽 짝은 갈수록 맘에 들지 않는다.
수업시간에는 수강생들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며 좋은 점과 고쳐야 할 점을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있는데 내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있는 그림을 제출하자 그가 한마디 했다. 너무 당당하다. 남편이 싫어하겠다.
모두가 싸늘히 침묵했다.
나는 그가 싫어졌다. 자신의 남편을 흉보는 수강생에게 마치 선생님인양 아이 가르치듯이 남편을 그리 말하면 안 된다고 하거나 요즘 남자들이 불쌍하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불쌍하기는 시발 어디서 계속 나타나는 좇같은 새끼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내가 더 불쌍하다 시발. 네일을 예쁘게 하고 온 수강생에게 그런 건 자기가 돈 벌어서 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를 비난하면 안 되고 늘 위해줘야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꾸미는 비용을 대는 건 안된다는 것이다. 지랄하네. 참된 풀뿌리 이기주의 남존여비랄까.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만 무턱대고 싸우지는 않는다. 싸움의 역치가 있다. 납득할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몸과 입이 움직인다. 한 조각 사회성의 도움을 받아 수업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그래서 불쌍하게도 그런 말을 듣고 있었다. 그에게도 기회는 있어야 하니까. 내가 이렇게 착합니다.
그런 그가 오늘은 내게 떽이라고 했다.
떽?
잘못 산 종이를 빨리 소비하기 위해서는 연습을 많이 하면 되지 않냐는 나의 말에 대한 답이었다. 그의 태도에서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모종의 압력과 함께 나를 그의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확고히 알렸다. 감히 어린것이 어른에게 충고를 하다니 건방지구나.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인간이었고 그보다 나이 어린 여자는 늘 아래였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못 배웠으면 가르쳐줘야지. 나는 찬찬히 능숙하게 잘 가르치지만 필요할 땐 칼을 휘둘러 푹 쑤셔 넣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몇 달 전 다녀온 알함브라 궁전을 거의 2달째 붙들고 그리고 있다.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올 때까지 그릴 심산인가 본데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림연습은 안 하고 그래서 그림이 늘지는 않는데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은 받고 싶어서 투덜거리는 이 욕심쟁이는, 생활 속에서 늘 그림을 그리고 숙제를 3장씩 해오는 내가 하는 충고가 듣기 싫었을 거라 추정된다. 그는 이제 나에게 어떠한 대답도 인사도 듣지 못할 것이다. 감히 떽이라니...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이제 내 입 한켠에 그를 향한 속되고 상스러운 말이 준비되었다. 그의 오래되고 딱딱한 남존여비 사상을 언제든 푹푹 찔러버릴 수 있도록. 나를 준비시킨 건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찔리기 전에 잘 닥치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