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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경 Mar 06. 2024

미의 기준과 요가의 사이 03

지난번 요가의 다이어트 효과(?)에 대해 글을 쓰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요가로 얻은 외적인 변화에 과연 만족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한 것은 요가 수련이 내가 몸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르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10대 시절부터 20대 초까지 모든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 거쳐가는 다이어트 강박.

나 역시 그러한 과도기 시절이 있었으며 아이돌처럼 빼빼 마른 몸이 예쁘다고 생각해왔다.

어느 옷을 입어도 모델처럼 옷 태가 나기 위해서는 마른 몸이어야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몇 번의 해외 생활이 이러한 나의 편협한 미의 관점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해외에서는 아침, 저녁 날씨 상관없이 남녀노소 공원을 러닝하고 있었고

헬스장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으며, 헬스 이외의 운동들도 너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당시의 한국은 지금처럼 다양한 운동 열풍이 불지 않았다.)

덕분에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그들의 태닝 한 몸이 멋있어 보였고,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함은 모델 같은 마름의 예쁨과 또 다른 ideal body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 해보겠답시고 어쭙잖게 살을 태운 내 얼굴은 시골 산골짜기 소녀 그 자체였고,

(태닝샵에서 비싼 돈을 주고 태운 게 아닌 바닷가에서 마냥 태워서 그랬을 수도)

운동을 시도해도 얼마 안 가 그만두는 나의 작심삼일 마인드는 근육이 키워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아, 나의 비루한 몸뚱어리는 아무리 건강한 척을 흉내 내려 해도 따라가질 못하는구나.

하고 냅다 포기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요가를 만난 후 나에겐 또 다른 ideal body 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인스타 속 요가 고수들의 속부터 차오르는 단단한 몸!


나는 요가를 하면 이들처럼 될 수 있겠지라는 기대에 차오르게 된다.


간극과 갈등

수련 6년이 된 지금, 내 몸은 6년 전 과거의 나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일단 어깨가 넓어졌다.

아마도 라운드 숄더와 굽은 등이 펴져가는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어깨가 나오게 되지 않았나 추측한다.

아직도 라운드 숄더가 완전히 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과거의 안타까울 정도로 말려있던

내 어깨와 비교하면 많은 변화이다.

(이 라운드 숄더를 펼쳐내기 위해서 정말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 아직도 고통은 받고 있는 중.)

그리고 팔 근육이 많이 생겼다.

생각보다 아쉬탕가는 상체를 너무 많이 쓴다.

암 밸런스가 기본이며 시리즈 후반부로 갈수록 자꾸 내 몸을 두 팔로 지지해야 하는 자세들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쉬탕기들은 몸 전체가 발달되었지만 유독 상체가 더 발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끔씩 내 팔뚝에 안착되어 있는 근육들을 보면 아직까지 낯설기도 하다. (물론 남들 눈에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나는 과거보다 더 많은 근육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해외에서 바라봤던 꾸준히 운동하는 멋있는 삶을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깨가 넓어지고 싶지 않고 팔뚝이 굵어지고 싶지 않다.’

언제 이러한 생각이 드냐면,

예전에 즐겨 입었던 옷을 지금 입어보면 깜짝 놀랄 때.

달라진 나의 몸으로는 예전과는 다른 태가 나고 있기 때문에.

쇼핑몰을 둘러보다가 보이는 모델들의 여리여리함에 

내가 이 옷을 입어도 이러한 핏이 날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원하는 몸은 사실은 10대 20대 때와 같은

마른 몸을 추구하는 것일까?

분명 체형에 관한 나의 관점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이런 모순적인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과연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 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과연 내가 수련을 사랑하는 만큼 달라지는 나의 몸도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가끔씩 나를 지배한다.


종종 다른 아쉬탕기들의 수련 일지들을 찾아보곤 한다.

제각기 수련하는 진도는 달라도 대부분의 아쉬탕기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기에,

그들의 일지 속에서 나는 공감을 얻고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언젠가 일지를 보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요기니들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여자들이어서 그런 건지 다들 비슷하게 우람(?) 해져가는 어깨와 팔뚝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여리여리함을 포기하고 포세이돈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여성 아쉬탕기들의 마음.

물론 그들의 결론 역시 비슷하였다.

그래도 수련을 한다.

옷을 입을 때 예뻐 보이기보단, 그동안 나의 노력과 열정과 끈기가 쌓아 온 수련의 결실을 더 값지게 생각하고 견고한 암발란스를 더 가져보자고.

일지를 읽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게 정답이지,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 몇 년이 걸렸는데!

하지만 아직도 매트 위에서 나는 마음의 간극을 느끼고 이따금씩 갈등을 마주한다.

어느 날은 건강미가 뿜뿜하는 내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그다음 순간에는 패션 유튜버들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이 간극.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나의 무의식은 포세이돈으로 변하고 싶지 않나 보다.

나이가 좀 더 들면 포세이돈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미의 기준에 부합하려 노력하는 것은 쓸모도 없는 시간 낭비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은 그 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내 모습을

그저 바라보려 한다.

왜냐면 이러한 내 모습이 틀린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갈등의 모습도 수련의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요기니들도 거쳐가는 생각이니까.

아마도 앞으로도 이러한 단계들이 더욱 많고 다양해지겠지.

수련은 이래서 정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토록 다이나믹하고 복잡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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