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렸다 요 놈!
2023. 2월
저 4월 말까지만 일할게요.
냅다 퇴사를 질렀다.
아, 냅다는 아니고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1년간을 가슴속에 품어오며 혀끝에 맴돌던 말을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내뱉었다.
‘이제 더는 늦출 수 없어! 지금이야!’
라는 진취적인 기분과 정반대로 내 입에서 나오는
‘팀장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를 내뱉는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긴 했다.
인수인계는 확실히 해드리고 갈게요라고 그래도 쌓아왔던 정을 생각하며
인간미 있게 헤어지는 척을 했다.
팀장님은 네가 나를 따로 부르면서 이야기할 때부터 눈치를 챘다면서
웬일로 걱정과 달리 바로 오케이를 하셨다.
혹시나 이 순간만을 기다리셨는데 내가 너무 늦게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 챙길걸.
붙잡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빨리 내 일을 할 신입을 뽑아주면 어떻게든 인수인계를
후다닥 해치우고 유럽 여행 한 달을 갈 참이었다.
5월 초에 비행기를 타니까 그전까지 모든 걸 알려주고 모르는 게 있으면 유럽에 있는 동안
물어봐도 좋으니 좋게 좋게 마무리해보자라고 팀장님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그러나 이 지독한 나의 X회사는 나를 무려 10월까지 놔주질 않았다.
들어왔던 신입을 일부러 내치며 꾸역꾸역 해외에 나가있는 나에게 계속해서 부탁을 해 오는 것이다.
그놈의 의리와 책임감 때문에 그걸 계속 받아 준 나도 참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만.
덕분에 나는 퇴사자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둔갑하여
한 달 유럽 여행 내내 시차를 막론하고 일을 쳐냈으며, 밀려오는 연락에 새벽 두 시에도 카카오톡을 놓질 못했다.
하필 내가 몇 년만의 퇴사를 기념으로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것 마냥 각종 장기 여행을 미리 계획했기에
한 달 유럽 순회를 돈 이후에도 동남아 한 달 살기와 호주 한 달 살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렇게 세 달을 꼬박 유럽과 동남아 그리고 오세아니아에서 퇴사 처리 된 나의 X회사를 위해 일을 했다.
내가 하도 여행하다 말고 밤이건 낮이건 노트북을 켜서 일을 하다 보니
여행 다니면서 만나는 한인 민박 혹은 동행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내게 말하긴 했었다.
성경 씨, 호구세요?
글로벌 호구인 나는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아르바이트생임에도 불구하고
9 to 6을 철석같이 지키며 출근을 하였고,
야야 부럽지? 부럽지? 메롱 메롱 나는 떠나지롱~ 노래를 부르며 4월까지 직원들을 놀렸던 나의 과거 생활에 대한
업보를 고스란히 받았다.
이게 다 네가 똑 부러지게 처신을 하지 못한 탓이다, 쎄게 나갔어야 했다, 회사를 생각해 줄 시간에 너 인생이나 생각해라
라는 친구들의 애정 섞인 욕을 듣자 하니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에 매진했다.
당시의 꽁꽁 얼어붙은 취업 시장에 다시 한번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음을 몸소 체감했고,
연락을 준 회사에 차례대로 면접을 보기 시작하며 어서 빨리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자,
면접이란 원래 나의 본모습을 숨기고 사람 좋은 척, 착한 척, 일 잘하는 척, 진취적인 척
온갖 척 of 척을 하는 무대가 아니겠는가.
아이고,
나는 또 하필 무대 체질이어서
그간의 입 털기 스킬과 연기 실력을 뽐내었고
나의 스킬과 연기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면접관들 덕에 나는 합격 목걸이를 두 군데에서 손에 쥐게 되었다.
헛소리는 각설하고
감사하게도 나를 좋게 봐주신 회사들 중 뭔가 젊고, 내 또래가 많아 보이는 스타트업이 이유도 없이 마음에 끌렸다.
그리고 사실 면접 보면서도 아, 이곳은 가고 싶은 곳이다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면접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인지, 나의 사수가 되실 분의 미소가 너무 해사해서 그랬던 것인지.
그렇게 나는 운이 좋게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의 합격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X회사와의 이 지독한 연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8개월 만에 환승연애에 성공한 것이다.
2023년 10월의 마지막 주
긴장되는 첫 출근 날,
정신없이 인사하며 눈치만 하루 종일 보는 그런 날.
월요일 아침부터 팀 전체 회의가 있다고 했다.
열댓 명이 되는 팀원 사람들과 어색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며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회의 시간을 거치고
자리를 나서는 사람들을 뒤따라 나가는 참이었다.
면접 때 보던 인상 좋은 내 사수분이 내게 귀띔을 해줬다.
“이제 전 직원 앞에서 자기소개할 거예요.”
“네?”
아니 회의 시간에 팀원들한테 자기소개했는데 또 전 직원 앞에서 하라고?
갑작스러운 정보에 잠깐 당황해서 되묻는 사이
내 뒤에 안경을 쓴 나보다 어려 보이는 친구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상견례예요. 신입분들이 오실 때마다 해요. 앞에 앉으시면 직원들이 질문을 하나씩 할 거예요.
다행히 오늘 대표가 출장 가셔서 회사에 안 계세요. 어려운 질문은 없을 거예요. “
상견례요? 저 남자친구도 없는데요?
이것이 스타트업인가?
이들의 문화란?
머릿속의 물음표를 매달며 라운지로 향하자 정말 전 직원들 앞에 다리가 긴 기다란 의자 하나가 우뚝 있었다.
아, 저 자리가 내 자리구나.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8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앞에서 쭈뼛쭈뼛 앉으며 직원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뭐 사실 나는 아까 말했듯이 무대 체질이기에
남들 앞에 나서는 것과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이제 와 말하지만 상견례가 있다고 했을 때부터 내심 기대를 하긴 했었다.
나를 알릴 수 있는 아주 적절한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심지어 내가 궁금해서 나한테 질문을 해?!
어머어머 너무 재밌겠다!
이 회사만의 상견례가 시작이 되었고
직원들이 나에 대해 궁금한 질문들을 하는 시간이니만큼
좋아하는 음식, 그전에 했었던 커리어, 취미 등의 아이스 브레이킹 식의 질문들이 오갔다.
요가가 취미인 내가 ‘저는 요가를 열심히 해요!’라는 답변을 하자마자
직원들의 요가에 대한 질문 세례에 급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요가에 반응을 보이다니? 관심을 가지시다니?!
첫날이니만큼 내숭 좀 떨어보려고 했다만
결국 아침부터 나의 도파민이 충족되기 시작했고,
내 마음과 무관하게 또 나의 리액션 본능이 살아나 사실 나는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내 전두엽 대신 나의 도파민이 열심히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호르몬에게 몸을 맡긴 나.
아마 이 상견례 시간에 사람들은 잠깐이라도 알아챘으리라.
쟤 좀 이상해.
내 예상대로 스타트업 회사는 내가 이전에 다녔던 위계질서가 심하고 수직적인 회사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조용하긴 했지만 그다지 딱딱하진 않았고, 내 또래들이 많아 심리적으로 안정감도 들었다.
무엇보다 공감대 형성이 잘 될 것 같아 공감 없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나에게 또래 직원들이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회사 생활의 기대감이 올라가는 데에 충분했다.
다행히 내가 속한 팀원들 모두 모난 사람들이 없이 순둥순둥하여
나는 그 새를 못 참고 하루라도 빨리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내 자리 앞에 앉은
회의 시간 이후에 상견례라고 말해 준 안경 쓴 어려 보이는 녀석.
일단 딱 봐도 나보다 어린 친구일 테니 좀 편하게 대해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언제 말을 붙여보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찰나,
모두가 퇴근한 어느 저녁 시간에 그 녀석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회사 생활은 좀 어떠세요? 적응 괜찮으세요?”
어우, 어린 친구가 사회생활 참 잘하네.
라는 생각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네네. 아직까지 뭐 하는 일도 없고 해서 좀 심심할 뿐… 괜찮은 것 같아요!
근데 혹시 몇 살이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
“아, 저 93년생이에요.”
뭐?
지금 저 갓 대학 졸업하게 생긴 애가 나랑 동갑이라고?
라는 이 놀란 마음이 숨겨지지 않고 입 밖으로 나왔다.
“네?!?! 93이여? 저랑 동갑이시라고요? 아니 대박?
잠깐만, 너무 동안 아니세요? 저는 당연히 저보다 어릴 줄 알았어요!! 전 지금 막 대학 졸업하신 줄? “
나랑 나이는 동갑이지만 액면가로는 Z세대인 그 직원은 아…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는 듯했다.
그렇게 사무실에 남은 우리는 스몰톡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워낙 상견례 때 요가로 집중을 받은 터라 우리는 각자의 취미와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고
나는 이 회사에 클라이밍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클라이밍 채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그 클라이밍 채널에 우리 팀원들이 꽤 있다는 사실도 함께 획득할 수 있었다.
오? 느낌이 왔다.
클라이밍에 대한 관심이 있기는커녕 맨 손으로 뭐 어딜 올라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와 클라이밍이요? 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채널이 있다니 너무 좋은데요?”
일단 질렀다. 혼신을 담은 나의 연기 한 스푼과 함께.
“정말요? 그럼 같이 클라이밍 하러 가실래요? 원데이 클래스도 잘 되어 있고 해서.”
걸렸다 요 놈.
나는 이 어려 보이는 안경 쓴 친구의 사회생활적인 초대 멘트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취미 모임 채널만큼 회사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으로 사람들과 친해져야 한다고 누가 시킨 적은 없지만
나는 안 친해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 탓에 하루라도 빨리 이들과 친밀도를 높이고 싶었다.
그렇게 바로 나는 클라이밍 채널에 초대가 되었고, 순식간에 클라이밍 갈 날짜도 잡히게 되었다.
하. 큰일 났다. 클라이밍 진짜 해야 하네.
아오 이거 했다간 근육통 와서 요가 못할게 뻔하겠는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첫 클라이밍 날짜가 기다려지긴 했다.
클라이밍을 하는 행위 자체 보다 그 이후에 뒤풀이가 더 기다려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인생에 있을 거라 생각도 못한 클라이밍을 얼떨결에 회사 사람들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