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의 도약
답답한 상황, 짜증 나는 문제는 피하고 보는 성향이 있었다. 이런 일들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가? 물론 그런 모든 상황을 피한 건 아니지만 인간관계 문제에 있어서는 삼십육계 전법을 자주 썼다. 그래서 나름 대인관계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짜증 나는 동료나 친구는 안 보고 피하면 된다는 식으로 문제해결을 했었는데 그건 마치 적을 피해 모래 속에 머리만 묻어놓는 타조와 같은 어리숙한 꼴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편했다. 나는 늘 일도 잘하고 말도 잘하는 그런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불편한 게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관찰하고 나를 돌아보며 그런 모습들이 얼마나 어리숙한 인간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편하자고 무심하게 상대를 대하는 것이 결국 나에게는 문제를 회피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돌아보며 천천히 문제해결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의 변화로 요즘 부쩍 괜찮은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 나 스스로도 뿌듯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든다.
누군가
"저 길의 끝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피로"
라고 성의 없이 답하는 것이 아닌 진심을 담아 답할 수 있는 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실, 요즘 영재고 합격자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새로운 학기 개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러다 보니 출근 시간 전에 글을 쓰며 힐링하는 시간을 갖기보다는 노곤한 몸을 눕힌 채 멍 때리며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8월 말까지 신입생 테스트 및 상담 예약과 가을학기 편성에 신경을 쓰다 보니 각자의 파트에서 예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젠 아주 괜찮아졌다.
MZ 동료를 관찰하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십 대는 어땠었나? 난 더 심한 재수탱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 가만 보니 누군가 방법을 안 알려줘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약간 한가한 틈을 타서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ㅇ주임, 혹시 지금 하는 일 누구한테 배웠어?"
"전에 있던 원장님께 배웠어요. 딱히 누가 알려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전에 있는 원장이라는 사람은 사실 원장이 아니고 직원이었고 얼마 못 가 학원을 그만뒀다고 들었다. 이 친구는 첫 직장에서 제대로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롤모델도 없었을 것이다.
"나도 이십 대에는 자기처럼 독하게 일만 하고 내 할 일만 똑 부러지게 하는 걸 최고로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다 별거 아니더라고. 내 직장 상사는 교양 프로그램 CP 셨는데 완벽하고 여유로운 멋진 분이셨어. 그분을 롤모델 삼아 조금씩 나를 변화시켰지. 결국 일이란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니라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이더라고."
열심히 듣고 있는 이 MZ 동료를 보며 마음 한편으로 더 편하게 말해주고 격려해주고 싶었다.
"저 좀 잘 알려주세요. 제가 뭘 어떻게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며 본인이 뭔가를 고쳐야 하는데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아냐. 진짜 지금도 너무 완벽해. 너무 애쓰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단지 그 짐을 좀 나눠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우린 각자의 일이 아냐 사실 한 가지 일이잖아. 물론 각자 파트의 책임은 있지만 공통적인 교집합 부분은 서로 의논하고 나누고 팀워크를 발휘하면 좋겠어."
눈물을 글썽이는 그 친구를 보며 과거 나는 이런 말을 해주는 선배, 상사들이 있었는데 그때가 참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어른이라면 이 친구가 싹수없다고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줄 수 있는 게 뭘까를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난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지금처럼 잘하고 서로 즐겁게 일하면 되지 않을까? 서로를 존중하면서."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가식이 빠진 웃음이 빛을 뿜었다. 그리고 결국 해피앤딩의 드라마처럼 그녀가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딱 여기까지. 더 가깝지도 싫어서 피하고 싶지도 않은 지금의 이 거리가 좋다. 쓸데없는 TMI로 상대의 사생활을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함께 일하며 커뮤니케이션에 문제만 없으면 아주 좋은 것이다.
이제 문제 하나가 해결되니 직장이 천국 같다. 일이 바빠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도 즐겁다. 아니 그러니까 문제는 피하는 것이 아니고 차근차근 풀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온 마음을 다해 보듬어주는 대화를 하는 것. (남자한테 좀 이렇게 해보자! 가차 없이 자르지 말고!)
내가 드디어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