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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스탄트 Aug 24. 2024

멸망한대도 사랑하겠어!

8화

석건우 부회장의 항공우주 기술의 핵심인 엔진은 전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기술이었다. 

고체, 액체 연료를 넘어선 핵융합 엔진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따라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대기업에서도 그의 엔진을 쓰고 싶어 했던 것이다. 


정확하게 저녁 9시에 JFK 개인 착륙장에 도착했고 여독이 따로 있을 일이 없었다. 

충분한 휴식과 충분한 쾌락을 즐긴 석건우는 체내의 도파민 상태가 최고조였다. 

그와 회의를 하게 될 윌리엄 머스코 회장은 사적인 자리에서 석건우의 패기와 리더십을 칭찬하곤 했다.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유감스럽게도 여자에 대한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VIP 공항 검색대를 거쳐 공항을 빠져나온 석건우는 준비된 SUV 인공지능 차량에 탑승했다. 

머스코 회장이 보낸 것이었다. ‘더 칼라일 어 로즈우드’ 호텔로 간다고 수행비서 L이 말했고 평소 텍사스 본사에서 미팅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했다. 


펜트하우스는 센트럴 파크가 훤히 보이는 어퍼이스트 중심가에 있었다. 

L은 분주하게 짐을 정리했고 오피스 책상 위에는 석건우가 쓸 노트북과 집기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었다.


“한 잔 마실까?” 석건우는 평상시와 다르게 부드러운 어조로 L에게 말했다. 


“아, 저는 괜찮아요. 한 잔 드릴까요?”  

L은 비행기에서 마셨던 위스키의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위스키 말고 L이 좋아하는 샴페인으로 한 잔 할까?” 여전히 부드러웠다. 


L은 두려웠다. 보통 저런 식의 농염한 목소리에는 그녀에게 원하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L은 석건우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그와의 유희를 기다리기도 했다. 


‘오늘 비행기에서 했던 에피소드면 힘든데…’ L은 기내에서 그와 했던 게임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그럼, 샴페인 마셔요.”  


어차피 석건우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고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순히 그의 제안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오늘 밤도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석건우의 도파민을 위해 참아야 했지만 L도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석건우가 항상 들고 다니는 트렁크에는 비밀스러운 장비들이 있었다. 샴페인 한 잔을 마신 석건우는 침대 스툴에 트렁크를 열어 둘러봤다. 그의 손에 잡힌 첫 도구는 바이브레이터였다. 그리고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된 브래지어와 팬티. 그것들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끈이었다. 


“L, 침실로 와봐. 오늘은 특별히 네가 요구한 대로야.” 


L은 그것들을 본 후 도대체 내가 뭘 요구했다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명치 아래부터 전기가 올라오듯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도파민에 중독된 지금의 사람들은 남녀 간의 섹스를 그저 유희로 즐기고 있었다. 

석건우는 그 도파민에 유독 충실했을 뿐이다. 



이른 아침부터 해성은 늘 똑같은 루틴으로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셰이크를 마시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손우주가 놓고 간 반지 케이스를 열어 놓고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세 모녀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양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소행성 트로이의 폭발과 보라색 라일락 나무 아래서 처음 손우주를 만났던 그날 그리고 구해성의 아빠 구원이 잡혀간 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해성이 네가 뭘 안다고 시어머니라며 반지 이쁘다고 반지 주면 결혼한다고 그랬었지.” 


연수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해성의 어린 얼굴을 더듬으며 여리게 미소 지었다. 


“언니가 그랬어? 쪼끄만 게 까졌네.” 해리는 키득거렸다. 


“내가… 그랬었지. 그나저나 아빠 면회 다녀왔어요? 어떠세요?” 


아빠라는 말에 해리는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잘 지내신다. 당뇨 때문에 운동을 더 열심히 하고 있고 좋아지고 있다네.”


연수는 구원을 생각하다 씁쓸함을 와인과 함께 삼켰다. 


“엄마, 아빠가 모범수로 잘 지낸다고 하시니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있어요. 우리 자주 찾아뵙고 지금처럼 잘 챙겨요. 힘내시게.” 


해성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빠였다. 구원은 과거 한국우주항공에서 소장을 맡을 정도로 인생을 걸었지만 소행성 ‘트로이’ 폭발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폭발을 반대하는 그의 결기는 거의 투쟁에 가까웠다. 

결국 행동으로 옮겼고 전원생활을 하며 편히 쉴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하고 감방에서 당뇨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 아빠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해성에 비해 해리는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해성의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구원은 참 다정하고 따뜻한 가정적인 아빠였다고 느꼈다. 그러나 해리는 다섯 살 이후로 아빠를 볼 수 없었으니 가끔 보러 가도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 


*


“그 반지 주시면 결혼할게요?” 해성은 낮게 읊조렸다. 


차 안의 AI가 말했다. 


“반지는 결혼의 상징으로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주고받는 징표입니다.” 


“루루, 알겠어. 음악 좀 틀어줘.” 


가끔은 묻지도 않은 말에 정보를 알려주는 예민한 AI가 성가시기도 했다. 


“어떤 음악으로 틀어드릴까요?” 


“드뷔시, 달빛.” 


어린것이 어떻게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지가 엄청 비싸 보이는데… 애가 달란다고 주는 거야?” 


해성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말에 양평을 가야 할지 손우주와의 약속을 생각했다. 


“우선 오늘 미팅이나 걱정하자.” 


전 날 연구서적을 뒤지느라 잠을 거의 설쳤지만 오히려 본인의 상태를 알고 난 후 정신은 더 또렸했다. 

해성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뇌 줄기세포 자료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내선 인터폰이 울렸다. 


“구해성입니다.” 


“구박사, 자료는 미리 잘 받았고 오늘 미팅은 회장실에서 하기로 했으니 거기서 봅시다.” 


“회장실요? 회장실이면… 가장 탑층이죠?”


“아, 회장실 처음 갑니까? 맞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보일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10시 시간 맞춰서 갈게요.” 


해성은 오늘 미팅이 끝나면 사직서를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회장실에서 미팅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쩌지? 아니 갑자기 회장실이라니.’ 


회장의 비서가 블루투스 인터폰으로 해성이 온 것을 알렸다. 


“어.” 석건우 부회장의 모친답게 말이 짧았다. 


나성대 박사는 이미 반희애 회장 옆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 뱀 같은 얼굴을 보니 갑자기 돌아서서 나가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뇌과학 연구소 부소장 구해성입니다.”  해성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자료는 이미 받았고 나박사가 설명을 해줘서 좀 봤어요. 이리 와 앉아요.” 


반희애는 손가락을 휘익 가리켰다. 


한참을 줄기세포와 뇌세포에 관련된 최신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반희애가 중간에 나성대의 말을 치고 들어 왔다. 


“나머지 사업 얘기는 다음에 하고 그래서 구박 사는 S프로젝트에 합류합니까?” 


반희애의 거만하게 턱을 치켜세운 얼굴이 답변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게, 오늘 미팅이 회장님까지 함께인 줄 몰랐습니다. 저는 S 프로젝트에 합류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해성은 적의 없는 표정으로 그저 욕심 없이 말했다.  반면에 나성대의 얼굴은 회색빛이 되었다. 


“나박사, 이게 무슨 말입니까? 프로젝트 합류 생각이 없다니?”

 

굉장히 불쾌하다는 어조로 그를 째려봤다. 


“아, 아, 그게… 하하하 이게 무슨.” 나성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구해성 씨, 회장님 앞에서 왜 이러십니까. 불만이 있으면 저한테 먼저 얘기를 하고.”


해성이 나성대의 이야기를 잘랐다. 


“나성대 박사님, 난처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고 합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구해성 박사. 아버지 구원 박사가 우리 회사 우주항공 파트 소장이셨죠?” 


반희애는 여전히 구해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네, 맞습니다.” 


“구원 박사가… 업적도 많이 남겼지만 우리에게 많은 리스크를 안겼지. 덕분에 우리는 많은 돈을 국가에 환원해야 했어. 뭐 그 정도야 … 흐흐.” 


반희애는 씁쓸하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S 프로젝트 합류한다면 구원 박사를 석방시켜주지. 어때?”


반희애의 말에 해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S 프로젝트는 줄기세포(스템) 프로젝트로 비밀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동물 실험이 전 세계적으로 사라진 지금 반희애는 인체 적용 실험을 할 계획이었다. 구해성은 합류하고 싶지 않았다.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 최고 책임자가 본인이 돼야 하는 것이었다. 


‘아빠… 아빠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당당하게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가고 싶었던 구해성의 계획은 틀어졌고 앞으로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될지 미지수였다. 


“뭐, 지금 당장 결정하기 힘들면 오늘 저녁 8시까지 생각해 봐요.” 


반희애는 쌉싸름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일어섰다. 


“구해성 박사, 당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고 당신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 겁니다. 지금 이 상황을 봐요. 우리는 인재를 사랑하는 회사예요. 넓은 포용력을 갖고 있지. 구박사가 앞으로 뇌 줄기세포에 협조한다면 아버지도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겠지.” 


반희애는 창가로 걸어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딸은 딸이고. 나는 그저 우리 회사에 필요한 능력 있는 사람이 그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답변은 나성대 박사를 통해서 알려줘요. 당장 답변을 못하겠다면. 두 사람 다 나가봐요.” 


반희애는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 저. 그럼.” 


구해성은 여전히 할 말을 못 하고 버벅거렸다. 나성대가 그녀를 챙겨 회장실을 나왔다. 비서실을 지나 복도로 나올 때까지 꾹 참고 있던 말문을 나성대가 열었다. 


“이봐요. 구해성 박사.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런 말이라면 나한테 먼저 귀띔을 해주던가. 난처해서 원.” 


“처음부터 프로젝트 합류 생각도 없었고.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해성은 억지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뭐 죄송하다는 말을 듣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까 회장님 말씀 들었죠? 아버님 나이도 있으실 텐데. 감방 생활이 쉽진 않을 거요. 잘 생각하고 알려주십시오. 회장님이시니까 아버님 빼내오시지. 절호의 기회 아뇨!” 


엘리베이터가 왔지만 해성은 탈 생각이 없었다. 나성대는 물어보지도 않고 먼저 내려갔다. 그 앞에 멍하니 서있던 해성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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