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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스탄트 Aug 23. 2024

멸망한대도 사랑하겠어!

7화

‘(주) 한국우주항공’과 ‘뇌과학 연구소’는 다른 동을 썼지만 한 건물에 있었다.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건물 옥상에는 정원이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었다.


해성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우주는 그녀 옆으로 루프탑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왔다. 

그가 걸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뒷목부터 정수리까지 감각이 일어나는 듯 찌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왜 이러는 거지?’ 


“구해성 박사님은 왜 저를 못 알아보셨어요? 하하, 좀 뒤끝 있는 질문인가요?” 


살짝 보고야 만 우주의 눈에는 지난번에 봤던 집착의 눈빛이 보였다. 


“사실, 심포지엄 하는 날 단상에서 손박사님을 봤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났지만 그때 어느 정도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죠.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던 거죠.” 


“심포지엄이라… 저랑 10초 정도 눈을 맞추셨던 거 저도 기억합니다.”


우주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구박사님은 저에게 … 어떤 단어를 써야 부담이 적고 진심으로 들릴지.”


또다시 머뭇거렸다. 


“저에게 당신은 은인입니다.” 


평상시보다 다소 부끄럽게 말하는 우주의 얼굴이 마치 양평에서 나에게 라일락 꽃을 건넨 때 같았다. 


“네? 은인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너무 사무적이었나? 너무 진지해서 오그라들겠어.’ 속으로 생각하며 물음표를 만들며 우주를 바라봤다. 


해성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순간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저는 알코올중독자였어요. 언제부턴가 알코올에 의존했고 삶의 목적도 없고 의지도 없었죠. 사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여러 감정을 느낍니다. 지금 시대에서는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왔던 감정들이죠. 알코올에 의존해서 오랫동안 살았어요. 그래서 한국에 왔고 그러다… 당신 사진을 보고 기억났어요.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 그리고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 다시 살고 싶어 졌어요. 그날 이후 술을 완전하게 끊었고요.”


“아… 그러셨군요.” 


해성은 그가 느낄 수 있다는 감정이 궁금했다. 


“술을 끊었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심포지엄 하던 날 많이 당황하셨죠? 그런데 결혼은 진심입니다.” 


‘아, 진짜 왜 이러지?’ 해성의 콧등과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해합니다. 지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거. 그런데 구박사님과 제가 우리 인류를 살릴 수 있어요.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을 내주시면 제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기억나세요? 양평? 양평으로 오셔야 해요.”


“양평까지요? 지금 설명해 주시면 안돼요?” 


해성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그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음과 양, 남성과 여성, 음극과 양극, 우주는 왜 이런 자연의 이치를 만들었을까요? 기본이기도 하고 필요했기 때문이죠. 우리들은 그것을 잃어버렸어요. 나의 즐거움만 생각하다 보니 인류가 현재에 다다른 거죠.”


“음극과 양극, 하아…그런데 그게 왜 저죠?” 


“그건 이번 주에 양평에 있는 저희 집으로 오시면 설명해 드릴게요.”


“양평, 찜질방도 있었고.” 해성이 기억을 더듬었다. 


해성은 우주와 토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옥상 미팅을 끝냈다. 


*


해성은 사무실로 돌아와 연구 자료를 살펴봤다. 그러나 집중할 수 없었다.


‘아니, 양평에 뭐가 있는데? 양평까지 가야 한다는 거야? 나참… 그나저나 사직서를 써야 하나? 그들과 엮이기 싫은데.’


핸드폰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언니, 나 지하 2층 도착했어.” 해리가 뇌과학 연구소에 도착했다.


제약회사와 미팅이 있다고 미리 차량 등록을 해둔 상태였다. 


“차에 있어. 내가 내려가서 전화할게.” 


해성은 CCTV를 의식하며 최대한 외부인과 미팅하는 듯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해리는 커다란 박스를 구해 마치 약품이 있는 것처럼 들고 있었다. 


“해리야,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해. 나 따라와.” 


해성은 실험실로 걸어갔고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퇴근한 상태였다. 


“해리야, 내가 알려주는 대로 잘 따라 해야 해. 이걸 여기 붙이고 이건 여기.”


해성은 뇌파와 뇌 화학물질을 검사하는 검사기에 대해 간단한 조작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금부터 해성은 본인의 뇌의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을 조사할 생각이었다. 


“이걸 지금 왜 하는 거야?”


“그냥 해줘.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해성은 뇌 검사기 의자에 앉았고 손목과 심장 그리고 머리와 연결된 여러 선들을 붙였다.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버튼만 눌러. 순서대로. 검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알았지!” 


“okay. 시작.” 


“지금부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있을 거야. 10분 그리고 다음 10분까지 잘 지켜봐.” 


해성은 편안하게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있었다. 이후 그녀는 우주를 떠올렸다. 

해리는 이상한 그래프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해성을 한번 쳐다봤다. 

해성이 미소를 띤 얼굴로 앉아 있었다. 


*


석건우와 그의 여벌 양복을 챙긴 수행비서가 함께 전용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석건우는 커터기로 시거를 잘랐다. 


“오늘 회의자료 화면에 띄워. 그리고 미국 회의 시간에 맞춰서 한국에서 참석하는 명단 가져와.” 

시거 연기를 뱉어내며 말했다. 


“명단에 손우주가 빠졌어. 나성대 박사한테 연락해서 손우주도 참석하게 해. 

한국 시간으로는 이른 아침이 되겠군.” 


공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는 개인 전용기의 실내는 최고급 장식재로 고급스러움을 과시하듯 반짝였다. 

석건우가 일하는 공간은 집중이 잘 되는 간접 조명으로 주변은 어둡고 책상만 밝게 비췄고 그는 유독 이 책상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통로 뒤편으로는 퀸사이즈 더블베드가 있는 룸이 마련되어 있었다. 석건우는 업무를 먼저 처리하고 도착하기 전까지는 잠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리고 L, 오늘은 맥캘란 25년 산으로 한 잔.” 


석건우가 그의 비서를 부르는 이니셜이다. 그는 비서를 L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야릇한 눈빛에서 석건우의 심기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석건우의 요청이 아니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L, JFK 공항에 도착하면 몇 시지?” 


“21시에 도착하십니다.” 


과거 15시간 이상 걸리던 항공 기술이 발달하여 보통 9시간에서 10시간이면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회의 자료를 검토하고 여러 일을 처리한 후 석건우는 침대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L, 나 잠시 쉴 거야. 중요한 일 아니면 깨우지 마.” 


“딱, 두 시간만 쉬고 이후에 나랑 놀자.”  


L은 비행기를 탄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말문을 열었다. 


“저 오늘은 부드럽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L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에피소드 확인하고 상황 봐서.” 


석건우는 수행비서와 교감을 뺀 남녀 사이의 일도 공유하고 있었다. 

반희애의 소개로 전문 비서학을 전공한 L이 회사에 들어온 지 벌써 2년이 흘렀고 그 사이 그와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이 사라진 후 그들에게 남은 감정은 그저 자극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L은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했다. L은 술을 못 마셨다. 

그러나 지금은 술이 필요했다. 스트레이트 잔으로 한 잔 마셨다. 

식도부터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아… 이걸 어떻게 마시지?”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L은 한 잔 더 마셨다. 그녀에게는 차라리 취기가 있는 게 나았다.

두 시간 취침이 끝나는 알람음이 울렸다. L은 은은하게 조명이 깔린 침실로 들어가 석건우를 깨웠다. 

그가 그녀의 가녀린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L은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침대 옆 협탁에서 석건우는 VR 안경을 꺼내 L과 함께 착용했다. L에게 팔을 두른 채 영상 속의 에피소드를 찾았다. 그리고 고난도의 에피소드로 결정했다.   

그녀의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석건우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몸에 닿으며 L은 VR 화면 속에 집중하다 화들짝 놀랐다. 

그는 오늘 더 자극적인 토이들을 준비했고 중요한 회의가 있기 전 그의 도파민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L은 두려웠다. 그가 단계를 높일수록 L도 흥분했고 다행히 그의 키스는 따뜻했다. 

그녀의 애원하는 신음이 침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건 제발…”


석건우는 그의 도파민을 위해서라면 상대를 배려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


해성은 실험실에서 뇌파 측정이 끝난 뒤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언니, 너 좀 이상한 거 같아. 맞지?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알겠는데. 뭐니?” 

해성의 얼굴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언니, 그럴 거면 우선 저녁부터 먹자. 배고파.” 


“해리야, 미안한데 너 가서 저녁 먹고 집에 가. 난 남아서 자료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아.”


“괜찮겠어? 나 간다.” 


“어, 조심해서 가.” 


해성이 10분을 전 후로 살펴본 데이터에는 이상한 특이점이 있었다. 

처음 보는 화학 물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가끔 본인의 뇌파를 검사했었고 

뇌파 분포도나 스트레스 지수 등을 검토해 왔었다. 

특이점은 10분 후 우주를 생각했을 때 나온 데이터였다. 

집중도 수치가 높게 나왔고 좌뇌 우뇌의 균형도 처음으로 잘 맞게 나왔다. 


“뭐지? 뇌파 검사를 그렇게 많이 했었는데 이건 처음 보는 도파민 물질인데.” 


현재는 사라진 여러 가지 뇌 화학 물질이 있었다. 

‘세로토닌’, ‘페닐에틸아민’ 이 외에 ‘도파민’, ‘옥시토신’, ‘노르에피네프린’ 등이

다량 확인 되었다. 


과거의 자료를 살펴보니 사랑에 빠지면 전두엽 피질을 자극하는 일명 ‘러브칵테일’이라 불리는 호르몬이 평상시보다 많이 방출된다고 쓰여 있었다. 

이러한 호르몬들은 사랑의 감정을 촉진하고, 보상과 쾌락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다. 

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해성은 열중하면 집중력이 아주 뛰어났다. 그녀의 뇌에서 발견된 화학물질을 알아내기 위해 과거의 자료까지 샅샅이 찾아 정독하기 시작했다. 해성은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자료와 책을 통해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는 지금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더욱 확실시 됐다는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관심과 사랑은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분명 달랐다. 


“도대체 사랑은 뭐지? 인류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사랑을 내가 느낄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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