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도심은 황사 베일에 덮인 듯 흐릿한 아침이었다.
그저 가까운 것조차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답답함에, 해성의 가슴도 뿌옇게 막혀오는 것 같았다.
‘날씨가 내 인생같이 답답하네. 이렇게 우중충한 봄이 또 있을까?’
해성은 창 밖을 보며 생각했다.
‘그 넌덜머리 나는 소행성 트로이! 그 소행성만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이런 봄조차도 즐거웠을 텐데…’
해성은 문득 교도소에 처음 왔던 기억이 났다. 철문과 벽이 유난히도 단단하고 높게 느껴졌다.
세상과 단절된 또 다른 세상. 그런 곳에 구원을 홀로 두고 연수와 해성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해성은 좋은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저 아빠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그가 건강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억지로 웃기가 힘들었다.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구원은 유독 안색이 어두웠다. 그의 얼굴은 거의 흑빛에 가까웠다.
“아빠! 아빠! 얼굴이 왜 그래.”
해성은 접견실 유리에 손을 뻗쳐 구원을 안고 싶었다. 금세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해성아, 아빠 괜찮아. 울지 마. 아빠 많이 좋아졌어.”
“좋아진 얼굴이 아닌데. 아빠. 치료는 잘 받고 있는 거야?”
“어. 약도 잘 먹고 주사도 잘 맞고 있어.”
해성은 구원의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울고 있는 딸에게 뭐라도 말을 걸어야 했다.
“엄마랑 해리는 잘 있지?”
“어, 얼마 전에 해리 연주회 있어서 다 같이 얼굴 봤어요. 아빠도 같이 갔으면 좋아했을 거야. 해리 엄청 유명한 거 알죠?”
“그렇잖아도 엄마한테 들었어. 해성이 아직도 부소장으로 있는 거니?”
“네, 아직 다니고 있어요.”
“혹시 아빠 때문에 힘든 일 있거나 하면 말해. 아빠 예전 동료들 통해서 더 좋은 프로젝트 있는지 알아볼 수 있으니까.”
“아빠, 저 걱정 말고 건강이나 잘 챙기세요. 저 인제 어른이에요. 아빠가 직장 알아봐 주고 그럴 나이 아니라고.”
“하하. 그러게 우리 해성이 다 컸네. 아빠한테는 마냥 귀여운 짱구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커서 어른 흉내를 내고.”
“아빠, 어른 흉내가 아니고 어른이래두.”
하고 싶은 말은 정작 못 하고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십분 면회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아빠, 제발 건강 잘 챙겨요. 또 올게요.”
“해리랑 같이와. 해리 보고 싶다.”
“알았어. 맨날 해리만 이뻐하고.”
해성은 마음에도 없는 투정과 응석을 부려보았다. 그래도 아빠에게 받은 사랑이 해리보다 몇 배는 더 많지 않았던가. 그런 영웅 같은 아빠가 앙상한 뼈만 남아 힘든 날들을 보낼 거라 생각하니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
머스코 회장과 석건우의 조찬 모임은 펜트하우스 VIP룸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둘의 은밀한 미팅은 어떤 내용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각자의 수행비서만 들어간 단독 미팅이었다.
“미스터 석, 줄기세포 인공 간 복제에 성공했다고 들었소. 신체 실험까지 완료한다면 미국보다 빠른 건데… 내용을 좀 더 알 수 있을까?”
“프레지던트 머스코, 여기 자료 있습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시판으로 나가기 전 단계까지 정리가 됐습니다.”
한참 자료를 살펴보던 머스코는 회심의 미소를 뗬다. 우주뿐 아니라 줄기세포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좀 더 사업을 확장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해 보였다.
“석, 만약 실험이 성공적으로 통과한다면 우리와 합작으로 전 세계 특허로 진행하는 건 어떤가?”
“어떤 조건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우선 저희 회장님께 보여드릴 계약서를 주시면 상의 후 연락드리죠.”
금발 머리에 도시적인 외모인 머스코의 수행비서는 유난히 깊이 파인 에이치라인 스커트를 입고 각선미를 뽐내듯 서 있었다.
“클레어, 미스터 석에게 이후 일정 브리핑 해줘.”
하루 일정을 L과 공유했어야 했다. 그런데 클레어와 L의 은근한 신경전이 있었던 것이다.
L은 클레어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일정을 지금에서야 알려주는 클레어의 말을 받아 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L은 속으로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야! 일을 이따위로!’
L은 은근하게 본인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머스코 회장을 꼬셔야 할지 도발적인 생각이 솟구쳤다.
만약 그녀의 꼬임에 넘어간다면 석건우 부회장의 사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녀의 이런 생각은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함일 뿐 석건우를 존경하거나 연모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일적으로 남에게 지기 싫은 경쟁의식이 강한 여성일 뿐이었다.
“조식 미팅 이후 회장님과 코-프레지던트 석은 10시에 예일 대학교 의료진들과 미팅이 있습니다. 이후 1시에 본사로 이동하실 겁니다. 중식은 기내에서 준비하겠습니다. 본사를 둘러보신 후 머스코 회장님은 3시에 개별 미팅이 있으십니다. 코-프레지던트 석은 한국인 박사들과 같은 시간 미팅이 있습니다. 5시에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 6시에 로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드실 예정입니다. 저녁 8시에 한국과 실시간 화상 회의를 하실 겁니다. 이후 ‘비밀의 정원’으로 가십니다.”
“L 일정 차질 없이.”
아이패드에 받아 적던 L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클레어의 독특한 영어 발음은 발칸반도 또는 북유럽 어떤 지역 사람이었고 오늘따라 브리핑을 빠르게 했던 것이다.
“네, 부회장님.”
‘클레어… 저게 진짜.’ L은 클레어를 살짝 째려봤다.
“회장님, 그 ‘비밀의 정원’은 뭔가요?”
“하하하, 가보면 압니다. 미스터 석이 아주 좋아할 곳이지.”
“제가 좋아할 곳이라… 흠… 기대해도 되는 건가요?”
“기대? 하하하 기대 이상일 거요! 장담하지. 잠시 쉬고 의료진 미팅 때 봅시다.”
여유로운 조식 미팅이 끝난 후 빡빡한 일정을 생각하니 석건우는 시거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는 예일대 의료진과 미팅하기 전 룸으로 돌아갔다.
“L, 시가 좀 가져와. 내가 늘 마시던 대로 커피도.”
L은 시가와 커터칼을 준비하고 에스프레소 투샷에 얼음을 가득 채운 물컵을 들고 그의 앞에 놓았다. 발코니에 앉아 의자에 깊이 파묻혀 있던 석건우는 센트럴파크를 보며 L에게 말했다.
“센트럴파크 가고 싶어? 산책.”
시가를 깊이 한 모금 빨며 음흉하게 L을 바라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우윳빛 살결 어느 정도 키가 있어서 힐을 신으면 석건우와 거의 엇비슷한 정도였다.
시스루 블라우스 사이로 살짝 비추는 가슴골이 갑자기 건우의 중심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지금 일정으로는 힘드실 거 같아요. 잠시 쉬고 의료진들 만나야 해서…”
“무슨 일정을 이렇게 빡빡하게 잡은 거야. 그리고 ‘비밀의 정원’ 검색해 봐.”
L은 옆에 앉아 검색을 시작했다. 구글 검색창에는 정원 사진들만 연신 나올 뿐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예일대 의료진들과는 줄기세포 관련한 여러 사업권에 대해 설왕설래가 오갔다.
거액의 돈을 스폰하고 있는 머스코 회장은 본인이 투자하는 것에 비해 결과물이 없는 것에 불만이 있었지만 한국 연구진과 비교하진 않았다.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앞으로 계획한 인체 장기에 대해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으로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역시 돈을 허투루 쓰는 머스코 회장이 아니었다. 거액의 스폰을 대고 있는 예일대 의료진들에게 은근한 경쟁심을 심어주고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본인이 아닌 석건우가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머스코 회장의 전용기로 텍사스 본사로 이동했다. 요리사까지 동승하는 머스코 회장의 전용기는 석건우의 전용기와는 차원이 다른 최신식 미래형으로 실내 디자인도 고급스러웠다. 점심만큼은 각자의 자리에서 코스로 여유롭게 먹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
양평은 서울과는 달리 시야가 깨끗했다. 먼지가 가득 쌓인 거울을 보는 듯한 서울의 하늘과는 달리 양평은 파란 하늘을 유영하던 햇살이 정원으로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승미는 해성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온 집안을 구석구석 정리하고 있었다.
쓸고 닦고 온 집안을 눈이 부시게 만들 작정이었다.
“여보, 그러다 쓰러지겠다. 좀 쉬엄쉬엄해요.”
손민수는 사실 걱정보다는 한번 해보는 말이었다. 승미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아빠, 해성이 오늘 괜찮겠죠? 좀 걱정이 되는데.”
“어차피 알아야 하니. 그날이 오늘이라면 우리가 준비한 대로 잘 보여줘야지.”
차분하게 말하는 민수였다.
“우주아빠. 오늘 컨디션은 좋은 거죠? 나이 들어서 여성호르몬 너무 많은 거 아냐?”
승미는 민수를 놀리듯 까르르 웃었다.
“허.. 참. 장작과 도끼로 단련된 요 이두박근, 삼두박근 그리고 이 단단한 복근!
오늘 셋째 만들까요? 당신 딸 갖고 싶다며. 내가 힘 좀 쓰지.”
민수는 저만치 있던 승미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뒤에서 허리를 꽉 안았다.
“어멋! 당신 왜 이래요. 호호호 저리가요!”
둘은 까르르 웃으며 거실에서 뒹굴었다. 소란스러워 이층에서 내려오던 우진은 늘 보던 풍경에 대수롭지 않게 승미를 지나쳐갔다.
“두 분 방으로 들어가세요. 여기는 가족 공공장소입니다.”
승미는 우진의 등 뒤로 숨으며 그를 방패 삼았다. 우진은 아무런 대응도 없이 무표정하게 이런 익숙한 상황에 민수를 만류할 생각도 없었다.
“하암… 물 마시러 괜히 왔네. 엄마, 엄마. 저 길 좀 갈게요.”
결국 우진이 옆으로 획 돌아서며 승미는 민수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또 둘은 까르르 거실에서 뒹구르며 애정을 과시했다.
“하아… 정말 못 말린다니까.”
우진은 눈 버렸다는 듯 또다시 하품을 하며 정수물을 한 잔 마시고 마당으로 나가버렸다.
“아아! 신이시여 제 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진은 파란 하늘에 신세 한탄을 했지만 흐뭇한 얼굴로 거실에서 장난치는 부모님을 바라봤다.
*
나성대는 우주 사무실 근처를 배회하다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우주는 한창 컴퓨터 모디터에 집중하여 데이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 미국 머스코 회장과 화상 회의를 합니다. 핵엔진에 관련해서 우리 기술을 실질적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분이지. 물론 우리들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우주 최강국 미국의 도움이 있으면 어쨌든 더 좋다는 거 아시죠?”
우주는 나성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눈을 유심히 쳐다봤다.
“오늘 발표할 자료 좀 봅시다. 우선 내가 알고 있어야 뭐래도 도움을 줄 거 아닙니까.”
‘이 사람 내가 석건우한테 점수 딸까 두려운가 보군.’
우주는 그의 얄팍한 속내를 금세 간파 했다.
“아, 그렇잖아도 어제 밤새워 작성하고 보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아, 이 사람 제대로구만. 어 한번 봅시다.”
우주가 보여준 자료는 나성대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영어와 우주 용어가 잔뜩 적혀 있는 암호 같았다.
‘햐아… 이 새끼 나 엿 먹이네.’
“어, 다음 장 오케이 다음 장.”
나성대는 알아보지도 못하는 슬라이드를 보며 알은 체를 했다.
“잘 만들었구먼, 그럼 9시에 회의실에서 봅시다. 난 빨리 준비하러 가야겠군.”
“네, 저도 곧 준비해서 회의실로 가겠습니다.”
나성대는 손우주의 사무실을 나오며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올랐다.
“이 새끼 봐라. 뭔 말인지 내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구먼. 보통 영리한 게 아냐.”
나성대 이사가 나간 후 손우주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휴우… 피곤한 사람이네.”
우주는 눈을 감고 의자 깊숙이 앉아 책상에 다리를 올렸다.
우주는 핵융합 연료를 사용한 우주 탐사선의 지속가능한 역할에 대한 보고서와 앞으로 있을 달과 화성의 거주지 건설에 대한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달과 화성의 인류 거주지 건설은 머스코 회장의 숙원 프로젝트로 이미 착공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많았다. 유성우들로 인한 시설 파괴 강력한 태양풍 등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