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양평으로 가는 길에 대형 마트를 경유하는 노선이었다.
해성이 즐겨 듣는 클래식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하암, 루루 고마워. 덕분에 잘 잤어. 지금 마트야?”
“네 마트에 도착하셨습니다.”
요즘은 과일이 참 귀했다. 전 세계적으로 농작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다.
해성은 귀한 종합 과일 바구니를 구매하고 다시 우주의 집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나니 머리가 조금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부터 30분 후면 도착합니다.”
해성은 불안함인지 떨림인지 모를 이상하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도대체 양평에 가면 뭘 알 수 있다는 거지? 참…”
“물 맑기로 유명한 양평에서는 친환경 무농약 쌀이 유명합니다. 또한 느타리버섯도 유명합니다. 이 외에도 친환경 농산물을 재배하여 가까운 서울로 유통하고 있습니다.”
“루루, 알았어. 정보 고마워.”
AI는 정말 대단하는 생각을 하며 이것저것 깊게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해성은 스스로 온, 오프 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고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가끔은 오프를 해두기도 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사표에 대해서는 잠시 신경을 꺼두기로 했다. 구원과 관련이 됐기 때문이다.
*
야외 풀장에 몇몇은 사람들이 각자의 커플들과 즐기고 있었다.
머스코는 그들에게 소리친 후 가운을 벗어던지고 물보라를 일으켰다.
“L, 들어와. 커몬!”
L은 석건우를 살짝 의식했는지 눈을 마주쳤다. 석건우는 풀장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L은 가운을 차마 벗을 순 없었다. 모두가 나체로 있었다고 해도 그녀는 거기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풀장 안으로 들어가자 물어 젖은 하얀 속살이 드러나 시폰 가운과 밀착되며 더욱 육감적이었다.
“오우, L 당신은 정말 낮과 밤이 다르군.”
머스코 회장은 그녀의 어깨를 지나 가슴골을 바라보며 거추장스럽게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시폰 가운이 걸리적거려 벗기려 했다.
“안 돼요! 그냥 두세요.”
L은 단호했다. 그러나 머스코는 그녀를 탐하기로 작정한 이상 멈추지 않았다.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L은 석건우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러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L과 눈이 마주친 석건우는 야외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옆에 앉은 여성에게 말을 시켰다. 석건우의 눈빛으로부터 외면당한 L은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모르긴 몰라도 옛날 방식의 성교였다. L은 놀랐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인체 접촉으로 하는 것은 혐오스럽고 타인과 타액이 섞이는 것들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느낌은 마치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오는 묘한 느낌이었다.
석건우와는 그저 가상 세계에서 도파민을 위한 게임을 했을 뿐이었다.
머스코는 석건우와 달랐다. 좀 더 다정했고 신사다웠다.
L과 머스코를 보며 야릇한 흥분에 도취된 석건우는 홀로 다시 들어갔다.
L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머스코에게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석건우는 홀에서 마조히스트가 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생겼고 고문받길 간절하게 원하는 여자를 발견했다.
*
우주는 도착하자마자 거실로 뛰어들어갔다.
“여러분 다들 안녕하셨죠!”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도 없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우주는 정원으로 나와 찜질방 쪽으로 갔다 찜질방은 집 뒷마당 우측에 있었다.
찜질방 안에서 부모님과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여기 있으셨어요? 해성 씨라도 왔으면 아무도 없다고 갈뻔했네.”
인기척 없이 문을 활짝 열었던 우주 때문에 셋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으악!”
“어마나!”
“어머! 우주야. 놀랬잖아.”
“해성 씨 올 시간 다 됐는데 여기서 뭐 하세요.”
셋의 얼굴을 보니 할 말을 잃은 우주였다. 얼굴에 머드팩을 두껍게 올리고 식혜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우진이 너까지…”
“찜질방엔 시계가 없어서 몰랐네. 형도 식혜 한 잔 할래?”
마침 우주에게 전화가 왔다. 해성이었다.
“도착하셨어요? 네, 주차하세요. 제 차 옆에 하시면 됩니다. 나갈게요.”
민수, 승미, 우진은 정신없이 얼굴의 팩을 떼어내고 서둘러 찜질방을 나왔다.
해성은 약간 초췌해 보였다.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해성에겐 무거워 보여 우주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뭐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왔어요?”
우주는 창백해 보이는 해성이 걱정돼서 한 소리 했다.
우주의 뒤를 이어 민수, 승미, 우진이 따라 나왔다.
“어머! 해성아, 정말 잘 컸네. 오랜만이야.” 승미는 해성에게 뛰어가 안아 주었다.
“누나, 저 기억해요? 코 찔찔이 꼬맹이.”
“그럼 기억하지. 지금은 듬직하네.”
“그럼요! 누나보다 키도 커요.” 우진은 애써 해성을 내려다봤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우주 식구 모두는 해성을 가족처럼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은 거실에 모였고 승미는 해성이 사 온 과일과 차를 내왔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며 무슨 말을 누가 꺼내야 할지 몰라하고 있을 때 우주가 해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구해성 박사님께 꼭 양평을 와야 한다고 말씀드린 건 저희 부모님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이유 하나와,
지금의 부모님 두 분이 저희에게 존재하게 된 원인인을 직접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부모님 그리고 그들의 존재?”
머리를 갸우뚱하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의 해성이었다.
“저희 부모님은 지금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금실 좋게 살고 있으세요. 너무 사이가 좋고 사랑해서 …”
우주는 부모님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민수는 승미가 좋아하는 샤인머스켓을 한 송이 때어 먹여주었다.
“두 분이 떨어지지 않고 즉, 졸혼을 하시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저도 뇌파 검사를 했었습니다.
요즘은 부부가 함께 사는 케이스도 없고 다들 졸혼 아니면 싱글로 살고 있어서 우리 부모님이 어떤 부분이 다른지 알고 싶었거든요.”
우주는 중간에 말을 끊고 해성의 표정을 살폈다. 약간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저희 부모님의 뇌파검사에서 특이점이 있었고 뇌 화학물질에서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많은 부분이 발견 됐습니다. 일명 ‘러브칵테일’이라고 부르는 뇌 화학 물질들이죠.”
해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러브칵테일’
“왜 우리 부모님께는 러브칵테일이 남아 있는 걸까? 궁금증에서 시작 됐습니다.
소행성이 폭발된 그날 8시를 기점으로 해성 씨 저희 집에서 뭘 했는지 기억나세요?”
“흠. 저녁을 먹고 다들 찜질방에 있었죠?”
해성은 그때로 돌아간 듯 기억을 더듬었다.
*
2029년 4월 19일 오후 7시 30분 양평
“자! 모두 바비큐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셨죠? 다음 코스는 우주최고 원적외선으로 피로를 풀어 줄 찜질방입니다.”
민수는 사람들을 찜질방으로 안내했다. 승미와 연수는 각각 아이들을 챙겨 문 앞에 섰다.
“민수 씨가 진짜 만들었어요?”
연수는 외관을 구경하며 감탄 섞인 어조로 물었다.
“어. 진짜 오래 걸렸어. 우리 집은 디자이너한테 맡긴 건데 동시에 이 사람이 찜질방을 만들기 시작했어.
혼자.”
민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잡이를 잡고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세계 최초, 우주쇼가 있는 찜질방! 오픈합니다. 셋, 둘, 하나! 짜잔!”
찜질방 문이 열리며 내부가 공개됐다. 찜질방 전체는 황토와 볕집으로 둥근 돔 형태로 마감됐고 천장에는
자수정과 옥, 앙증맞은 조개로 여러 별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어른과 아이들 모두 찜질방으로 들어가며 감탄 했다.
별자리를 유독 좋아하는 우주는 들어가자마자 민수가 만든 별자리를 보기 위해 반듯하게 누웠다.
그 옆으로 우진이 눕자 해성과 해리도 따라 누웠다.
“어머, 여보 언제 별까지 심었어요? 너무 예쁘다. 애들이 정말 좋아하네.”
“진짜 예뻐요. 어떻게 이런 걸 만드세요?”
연수도 신기한 듯 천장을 바라봤다.
“오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핸드메이드 식혜. 그리고 한과.”
승미는 직접 만든 디저트를 들고 와 챙겨줬다. 디저트까지 먹은 후 민수가 시키는 대로 찜질방에 누웠다.
“모두 눈 감으세요.” 민수는 불을 껐다.
“셋, 둘, 하나. 눈 뜨세요.”
“와아! 우와!”
“엄마! 엄마! 너무 신기해요!” 우주는 감탄하며 말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황토 흙에 박혀 있는 보석과 그 돌들을 연결한 반짝이는 야광 선을 보며 하나 둘 별자리 맞추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작은 곰자리다.”
“오리온자리? 전갈자리?”
민수가 자세히 들어보니 그냥 아는 별자리를 외치는 듯했다.
“하하하, 자자 여러분 제가 레이저로 가리키는 별자리를 한 분씩 맞춰 주세요.”
늦은 저녁시간이 되어도 그들의 별 맞추기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민수의 재미있는 신화도 함께 듣다 보니 아이들이 하나둘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밤하늘은 소행성 트로이의 잔재들이 별똥별을 만들며 떨어지고 있었고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양평의 밤은 깊어만 갔다.
*
석건우는 머스코와 사라진 L을 찾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곳에 흥미를 잃었다. 이런 극강의 마조히스트 놀이도 그에게는 맞지 않았다.
술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그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Bar로 향했다.
“맥캘란. 스트레이트로 투샷.”
웨이터가 한 잔씩 따라 그의 앞에 놓기가 무섭게 원샷으로 넘겨버렸다.
석건우는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 머스코와 L이 수영장에 있었던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석건우가 느끼는 더러운 기분은 딱히 스스로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L에 대한 집착인지 소유욕인지도 몰랐다.
“아, 씨발, 휴우… 바텐더, 얼음 넣고 한 잔. 올리브 있나? 아몬드라도?”
“올리브, 아몬드 다 있습니다. 드릴까요?”
“어. 고마워.”
웨이터가 문쪽을 쳐다보자 석건우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갔다. 타월을 두른 머스코와 L 이 서 있었다.
“헤이, 미스터 석. 찾았잖아. 잘 즐기고 있는 건가?”
“네. 재밌네요. 여기.”
석건우는 미소를 짓고 싶었는데 입꼬리가 마음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머스코가 자세히 봤다면 썩소 내지는 비웃음으로 봤을 수도 있었다.
“재밌지? 난 오늘 L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네. 아주 뛰어난 인재야.”
대형타월을 몸에 두르고 있는 L은 추운지 파르르 입술을 떨고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차량 맞아 보였다.
조소 띈 얼굴의 석건우와 눈이 마주친 L은 머스크에게 기대어 스르르 쓰러졌다.
“어! L! 왜 그래?”
석건우는 방금 전 보냈던 냉랭한 눈빛은 사라지고 다급하게 L에게 뛰어갔다.
“온몸이 얼음 같네요. 머스코 잠시만.”
석건우는 재킷을 벗어 L을 감싸며 머스코의 팔에서 그녀를 번쩍 안았다.
침대방으로 뛰어가 L을 눕힌 후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한참을 같이 있어 줬다.
잠시 후 눈을 뜬 L은 옆에서 앉은 자세로 잠든 석건우를 보았다. 곤히 자고 있는 그를 깨울 수 없던 L은 조용히 침대 옆으로 빠져나왔다.
“깼어? 가자!” 석건우는 건조하게 말했고 그렇게 비밀의 정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