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드디어 새로운 시작...

by 소원 이의정

#4

여행사 기획팀에서 일한지 벌써 3년 접어들고 있었다. 여름 특수 시즌이 돌아오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오늘은 꼭 칼퇴를 하겠다고 다짐했건만. 퇴근 시간은 이미 2시간이 훌쩍 넘어갔고 메모가 잔뜩 붙어 있는 파티션 사이로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7월 초 장마가 시작되면서 우산을 필수로 들고 다녀야 했고 아니나 다를까 후드득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는 당장 그칠기미가 없었다.

습기 찬 외부 유리창 너머로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알록달록 우산들이 보였고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오늘 급한 일은 처리했고 더 이상 야근 할 기운도 없었다. 허기지고 시원한 맥주가 몹시 그리웠다.

때마침 걸려오는 전화. 중학교 동창 동네 친구 민재였다. 뭐지?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추네 고놈.

"가은아, 잘 지내지? 어디야?"

몇 개월 만에 온 전화라 더 반가웠다.

"어! 잘 지냈지. 난 지금 막 퇴근하려던 중인데. 넌 어디야? 한국이야?" 전화를 받으며 복도로 나갔다.

민재는 글로벌 게임회사 마케팅 팀장으로 미국으로 자주 출장을 다녔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보니 강남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퇴근하기도 했고 그러면 맥주 한 잔 하고 헤어지기가 다반사였다. 전 남자 친구와도 같이 만나 술을 마실 정도로 허물없는 죽마고우 친구였다.

"어떻게 알았어? 어제 LA 출장에서 돌아왔어. 보고서 올리고 나도 막 퇴근하려던 참인데.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면 같이 가고 아님 동네에서 보자. 시간 되는 거지?"

"마치 나를 꼭 만나야 할 것처럼 말하니 시간은 내야겠지?" 함께 웃으며 키득거렸다.

"짜식, 그래도 웃음이 나오네? 이 오빠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아, 걱정하셨구나. 그래 그럼 맥주 한잔 시원하게 쏘세요."

"그래 곧 보자."


버스에서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며 한숨 자니 목이 뻐근했다. 혹시라도 나를 본 사람은 없나 살펴보며 민재에게 톡을 보냈다. '어디야? 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우리 항상 가는 맥주바로 가 있을게.'

잠시 후 답변이 왔다. '그래? 나 소시지 먹고 싶으니까 안주시켜 놔. 나는 2 정거장 남았어. 이 오빠가 쏠 테니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어! 그래? 후회하지 마라.'

버스에서 내려 밤하늘을 보니 공중에서 춤을 추듯 내려오는 굵은 물방울들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며 쏟아지고 있었다. "아 시원해. 후우." 나는 비를 좋아한다. 툭툭 떨어지는 굵은 비를 유난히 더 좋아한다. 비 소리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신선함을 느끼게 해 준다. 오늘은 유난히도 비가 고맙게 느껴진다.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감싸며 우산을 밀치는 게 아닌가.

"뭐야. 아까 도착한 거 아니었어?" 민재였다.

"으악, 놀랬잖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우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민재는 잽싸게 우산을 집어 들고 내 머리 위로 비를 막아주었다.

"어 미안! 많이 놀랐어? 아니 난 먼저 도착한 줄 알았지. 그런데 내 앞에 걸어가는 게 보이길래. 애 떨어졌나?"

"으씨. 너 오늘 좀 비 오는데 먼지 나게 맞아볼래?"


투닥거리며 걷다 보니 둘 다 비를 맞고 맥주바 안으로 들어섰다. 바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음악소리와 뮤직비디오 화면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창가 쪽 자리를 찾았지만 입구 쪽 자리뿐이었다.

맥주와 안주를 시키고 앉아 민재를 마주하니 반가워서 웃음이 나왔다.

"너도 예나 지금이나 참 변함이 없다. 그렇지? 너 보니까 안정감이 생긴다." 민재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안정감이 생긴다며 왜 비웃냐? 우리 얼굴 안 본 지 3개월 넘었나? 너는 좀 야윈 거 같다. 다이어트해?"

"아버지 장례식에서 보고 지금 보니까 거의 4개월은 됐네. 다이어트는 무슨. 입맛이 없어"

민재는 예전 남자친구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질문을 삼켰다. 오랜만에 만난 가은이는 오늘따라 유독 섹시하게 느껴졌다. 살짝 젖은 머리와 은은하게 느껴졌던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박시한 아이보리 리넨 재킷 안에 반짝이는 핑크색 실크 민소매 나시가 살짝 보였다.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고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가은이와는 대학 졸업 후 10년도 넘게 동네 친구들과 같이 만나며 친구처럼 지낸 절친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가은이의 모든 행동들이 신경 쓰였다.

"입맛이 없을 계절이지. 오늘 몸보신을 해야 하나? 맥주로 되겠어?"

"그럼 고기 먹을까? 나가?"

"자리도 그렇고 요 앞 고깃집으로 갈까?"

"아냐 귀찮아. 비도 오고. 그냥 여기 있자."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이 흐르고 비도 퍼부을 만큼 퍼부었는지 밤하늘이 말끔해졌다. 그런데 나의 정신은 취기로 기분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좋았다. 편안한 친구와 시원한 맥주 정말 끝내주는 금요일 밤이었다. 민재는 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책도 많이 읽고 사회 경험도 풍부해서 가끔은 오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민재야! 그놈은 잘 지내겠지?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고 모든 게 아무렇지 않게 잘도 지나가네."

"그럼! 지구는 돌고 있지. 떠난 사람은 빨리 잊어야지. 너도 새롭게 시작하면 되는 거고."

"쳇! 남자 안 만나. 다시는! 너 더 마실 거? 난 그만 마시려고."

"그래, 나도 시차적응이 안 됐는지 피곤하다. 그만 갈까?" 둘은 함께 키득거렸다.

"시차적응? 으이그"

우리는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민재야 너네 집은 저쪽이잖아. 난 낭만을 씹으며 집까지 걸어 갈려고. 이제 집에 가." 민재를 두 팔로 살짝 밀쳤다. "야! 위험해. 밤거리를 여자혼자." 민재는 가은의 왼팔을 잡았다. "어! 너 우산 두고 왔어? 에이,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민재는 뛰어가서 가은의 우산을 챙겨 왔다. 가은에게 걸어가며 멀리서 바라보니 작고 동그란 등을 말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은아 택시 타자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냐. 괜찮아. 나 오늘 걷고 싶다고. 걱정하지 말고 가. 괜찮아."

"그래? 알았어. 그럼 잘 가고 도착하면 문자 줘."라고 말했지만 반대방향으로 가면서 가은이가 잘 가고 있는지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가은이가 속도를 내서 걷기 시작하자 민재도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은이는 가방에서 아이폰과 이어폰을 꺼내서 한쪽 귀에만 연결시켰다. 그리고 음악을 클릭했다. 'John Legend의 Save Room'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기분 좋다. 그래 깨끗이 잊고 새 출발 하자. 미뤘던 일을 시작해 보자. 아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바짝 따라오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민재였다. "(찰칵), 오 사진 잘 나왔는데."

뒤를 돌아볼 때 민재는 이미 사진을 찍을 생각으로 핸드폰을 들이 밀고 있었다.

"아 뭐야. 줘. 이리 줘."

"야 너 진짜 이쁘게 나왔어. 와. 여기 가로등 조명 때문에 잘 나왔다."

"알았으니까 이리 주세요." 민재의 핸드폰을 뺏어 사진을 확인했다. 순간적으로 뒤돌아보는 모습이 나름 자연스럽게 잘 나왔다. "뭐 사진은 잘 나왔네. 보내줘. 그런데 왜 따라와. 너도 피곤할 텐데 빨리 들어가서 자라니까."

"야 친구가 보디가드 한다는데 걱정하지 말고 가자. 무슨 노래 듣고 있었어?" 민재는 다른 쪽 이어폰을 귀로 끌어 갔다. 키가 큰 민재에게 줄이 쏠리다 보니 가은의 귀에서 이어폰이 떨어졌다. 민재는 한쪽 이어폰을 가은의 귀에 꽂아 주었다. 그러다 가은의 귓불에 손이 스쳤고 둘은 깜짝 놀랐다.

"너 키가 너무 커서 같이 못 들어. 들을래?" 핸드폰과 이어폰을 건넸다.

"아냐 됐어. 나중에."

어느덧 가은의 아파트 입구 앞에 도착했고 둘은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잘 가. 고마워 민재야."

"어 그래. 어서 들어가." 민재는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고 가은은 집으로 들어갔다. 민재는 가은이 코너를 돌아 들어갈 때까지 서서 지켜봤다.

'가은아 너 정말 모르니? 내가 너를 쭉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은아 잘 자.'

"휴우... 후훗 밤공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