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새로운 시작
#3
암막 커튼 사이로 햇살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움직일 때마다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얄밉게 느껴졌지만 화장실을 가고 싶은 마음에 돌덩이 같은 머리를 들어 올려 겨우 일어났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오후 1시가 넘었고 집안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귀에서 '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편두통이 있었다.
거실로 나가보니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어디 갔지? 휴우..."
이를 닦고 생수 한 컵을 단번에 들이켰다. 소파에 다시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감상했다. '커피 한 잔 마실까? 배는 안 고픈데 뭘 먹어야 시련당한 여자의 우아한 브런치가 될까? 나 오늘부터 싱글인 거네. 좋은 건가? 내일 월요일인데 점심에는 뭘 먹지?' 등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엄마와 동생이 부스럭 거리며 들어왔다.
"어! 언니 일어났어? 밖에 날씨 엄청 좋다." 동생 민주가 한가득 사 온 물건을 주방 식탁에 내리며 말했다.
엄마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뭐라도 먹어야지? 너 좋아하는 갈비탕 사 왔는데, 지금 먹을래?"
"어 제가 준비할게요." 민주 옆에 서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냄비를 꺼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민주의 노력으로 평소 관심도 없었던 연예인들의 가십거리를 듣고 있었다.
"언니, 내가 오랜만에 모카포트로 커피 내려줄게. 잠깐 기다려."
입맛이 없어서 밥을 조금만 퍼서일까 평소 가장 늦게 먹던 내가 빨리 먹고 일어서려는데 동생이 기특하게도 커피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거실 창문으로 걸어갔다. 잔인한 4월이라는 그 4월이 나에게도 잔인한 계절이 될 줄이야.
아파트 단지 내의 벚꽃들은 온통 화려한 핑크빛이었고 지저분하게 떨어진 목련꽃은 지금의 내 모습 같았다. '나쁜 새끼! 계절도 참 잘 정했네.' 속으로 생각하다 문득 그의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라 짜증이 났다. 그는 서글서글한 쌍꺼풀 없는 눈매에 짙은 눈썹의 호감 가는 얼굴이어서 나와 사귀기 전에는 동아리에서 몇몇 여학생들의 짝사랑 대상이기도 했다. 내가 특별히 집착했던 그의 신체 부위는 적당히 도톰한 입술이었는데, 키스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수영을 10년도 넘게 하고 있었던 그는 유난히 어깨가 넓어서 두 팔로 안아주면 안도감이 들 정도로 편안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휴우..."
모카포트에서 스며 나오는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마트에서 사 온 에그타르트를 상자에서 꺼내며 엄마가 말했다. "가은아 집이 너무 삭막하다. 음악 선곡한 거 좀 틀어봐." 민주가 엄마를 위해 선곡한 뮤직 플레이리스트는 클래식, 가곡, 재즈, 트로트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었고 일요일에 커피를 마실 때는 클래식을 들었다. 첫 곡은 '조성진'의 '클로드 드뷔시'의 명곡 '달빛'이었다. 세 모녀가 거실 소파로 티테이블을 차리고 모여 앉았다.
엄마는 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가은아, 힘들 거야. 벌써 몇 년이니 둘이. 그런데 인연이 아닌 거다. 지호가 그렇게 마음이 변한 건 어쩌면 잘 된걸 수도 있어. 결혼하고 마음이 바뀌었으면 어쩔뻔했니. 결혼하면 둘이 평생을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데."
중간에 민주가 끼어들었다. "아니 무슨 조선시대야. 평생을 서로 책임지고 살게. 결혼하고 살다가 안 맞으면 이혼할 수도 있는 거지."
"얘가 진짜! 이혼이 뭐 장난이야! 신중하지 못하게 그런 소릴 하니! 너희 둘 다 이혼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우리 집안에서는 이혼은 없어."
민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에그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엄마의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동생 민주는 이제 막 회사에 입사해 첫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런 딸이 걱정이 됐던 것이다. 화학과 대학원까지 졸업한 민주는 화장품회사 연구직으로 들어가 원하던 일을 하며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였다. 민주는 어릴 때부터 엄마 얼굴에 팩을 해주고 직접 스킨을 만들고 립밤을 만들었었다.
"가은아, 집에만 있지 말고 공원이나 한 바퀴 돌고 와. 바람도 쐴 겸."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엄마의 말을 듣기로 했다.
민주가 "언니, 같이 가자. 나 너무 배불러."
혼자 가고 싶었지만 이미 준비를 다 하고 따라나서는 동생과 같이 나갔다. 햇살은 따뜻했고 공기는 신선했다.
내 가슴은 아직도 꽁꽁 얼어버린 겨울왕국이었는데 계절은 그렇게도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버들강아지가 연한 초록빛으로 살랑거리고 만개한 벚꽃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서러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에 나를 떠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당장이라도 전화를 해 벚꽃 구경 가자고 할 것 같았다. 모든 기억을 리셋하고 초기화시키고 싶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아파왔다.
문자가 왔다. "가은아 우리 데이트 통장은 알아서 정리하고, 너 갖고 싶은 거 사. 주말 잘 보내고. 쉬어."
"아씨!"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는 말이 나왔다.
"언니, 왜? 뭐야? 문자 왔어? 오빠야?"
"어. 데이트 통장 정리해서 알아서 쓰래."
"어? 얼마나 있는데?"
통장을 확인해 보니 180만 원이 찍혀 있었다. 올여름에 그의 부모님이 계시는 태국으로 여행을 갈 생각으로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호 ... 거지 같은 놈!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