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전
#2
떨굴 수 없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눈물이 바다가 되어 끝도 없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싶어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평범했던 나의 일상이. 시간이 흐르듯 함께 흘러갈 거라 생각했던 내 인생이 거대한 태풍을 맞이한 것이다.
어디부터 잘 못 된 걸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그런 마음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럼 그동안 나를 만나면서 연기를 했던 거야?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아니었나?
나와 함께 했던 수많은 미래 계획과 달콤한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나?
내가 잘 못한 게 뭘까? 집에 돌아가는 2시간 남짓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무거운 돌덩이에 눌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고 해야 했다. 만약 이게 마지막이라면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한다. 우리의 시간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부모님은 태국에서 나름 괜찮은 카페를 하고 있다. 규모가 큰 카페의 내부에는 작은 연못도 있고 방갈로 같은 작은 방들이 둥글게 연못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버님의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그의 어머님도 적잖이 힘들었을 듯 하나 나름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50대 초반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대기업에서 퇴직하신 후 카페를 차리겠다며 태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 1년간 준비를 끝내시고 홀연히 태국으로 사라지셨다고 했다. 아들의 성격은 남편과는 달리 침착하며 규칙을 잘 따르는 모범생이라 오히려 남편을 걱정하며 사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홀로 남겨졌고 어머님도 남편을 따라 태국으로 날아갔다. 외동아들로 외롭게 자랐지만 남을 배려하며 친절한 성격의 그는 흠잡을 곳 없이 반듯한 아들이었다. 그의 섬세하고 침착한 성격이 좋았고 여러모로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이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그 또한 그래서일까? 나의 변화무쌍한 성격을 좋아했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성격을 전부 받아줬던 그가 내심 헤어질 계획을 했던 것이다.
집 앞에 도착했다. 그가 말을 걸어왔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뿐이라 더 미안해. 가은아."
나에게 할 말이 '미안해' 뿐이라고? 5년간 그 긴 시간을 함께 하며 몸도 마음도 전부 너에게 줬던 나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미안해'뿐이라고? 정신이 들었다. 입이 무겁게 떨어졌다.
"개새끼! 너 정말 나쁜 새끼야. 정말 개새끼야. 어떻게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어? 어떻게!"
시야를 가렸던 눈물바다가 터지고 말았다.
"그런 계획을 세워놓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만나고 함께 하고 네가 사람이야? 아빠 돌아가시고 장례 다 치르고 우리 식구들한테 결혼 얘기까지 한 네가 정말 재정신이니?"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고 흔들며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한 달 전 아빠는 자주 가던 사우나에 갔다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던 중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서가은 씨 맞으시죠?"
"아... 네... 맞는데요. 저희 어머님 폰인데..."
전화 밖으로 어떤 남성과 엄마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받아보시죠."
"가은아... 네 아빠가 죽었어."
"뭐?! 무슨 소리야!"
회사에서 함께 야근하던 동료들이 달려왔고 나는 정신없이 슬리퍼를 신은 체 뛰어 나갔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그는 나보다 먼저 병원으로 달려가 엄마와 여동생을 위로하고 친척들에게 연락하고 함께 일처리를 했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두 해결했었다.
그렇게 든든한 너였는데, 나는 이제 누굴 믿고 살라고.
한참을 울고 나니 힘이 빠졌다. "그래... 그러자. 헤어지자. 미안해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가은아."
그는 여행가방을 내려주고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떠나버렸다.
한참을 서서 텅 빈 도로를 바라보다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술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500 하나 주세요."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어디야? 엄마가 그러는데 어디 갔다며? 어디 갔어? 언니? 듣고 있어? 야!"
"어... 집 앞 맥주집."
"뭐? 집 앞이라고. 무슨 일 있어? 기다려 내려갈게."
맥주집으로 들어오는 동생은 다급하게 나를 찾고 달려와서 내 퉁퉁부은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헉, 왜 이래? 오빠랑 놀러 갔었다며. 무슨 일이야?"
나는 남은 맥주를 다 들이켜고 한 잔 더 시켰다. "여기 500 하나요."
"500 하나 더 주세요. 왜 그래? 얘기 좀 해봐."
".... 어 우리 헤어졌어. 헤어지제. 나 이제 어떻게 살지?"
"어후. 뭐야?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둘이 결혼까지 생각하고 당연히 결혼할 거라 생각했고."
동생이 주저리 말하는 소리가 공중에 흩어지는 먼지 같았다. 우리의 지난 시간들도 그렇게 사그라들 것이다.
"나 어떡하니 민주야. 나 어떡해!" 민주는 내 옆으로 와 나를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