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드디어 결단을 내리다.

by 소원 이의정

#5

질척했던 장마도 한풀 꺾이고 무더위가 나를 녹일듯한 여름, 현지 안내 지원 특명을 받고 출장을 가게 됐다. "와 진짜 너무 덥다." 급하게 잡힌 방송국 촬영 스케줄을 소화해 낼 직원이 없었던 것이다. 여름 특수 시즌인 데다 현지 가이드들도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아무도 이 방송팀을 안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어도 어느 정도 되고 출장 경험이 많았던 내가 그 대타로 인솔하게 됐던 것이다. 말레이시아 패낭으로 가야 한다는 특명은 이틀 전에 내려왔고 나는 이틀 밤을 새우고야 말았다. 공항버스에 타자마자 인원과 스케줄을 다시 한번 체크하고 본사 팀장님, 방송국 작가와 통화하고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네 김작가님, 네, 1 터미널 J카운터 앞으로 오세요. 저는 도착했습니다."

촬영팀 인원은 작가 포함해서 5명이었다. 리마인드 웨딩을 찍는 90년대 최고의 스타 김준수, 최진아 배우들은 매니저와 같이 있었다. 내가 인솔할 총인원은 8명이었다. 공항에서 해야 하는 사무적인 일부터 환전과 보딩을 전부 끝내고 43번 게이트로 들어가 검색대를 지났다.

김작가는 다급하게 서류뭉치를 들고 와서 카페로 가자고 안달이었다. 비행기 탑승게이트에 가까운 쪽으로 일행들을 안내한 후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연출과 배우들은 공항 라운지로 갔고 스텝들은 게이트 앞 의자에 짐을 풀고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서프로님, 이번 기획이 좀 급하게 된 거라 일별 이동 장소하고 랜드마크 좀 확인해 볼게요."

나는 태블릿을 켜고 첫날 일정부터 설명했다. 미리 섭외 한 레스토랑 등 유명 관광지에 대해서 의견을 조율하고 친하게 지내는 현지 본사 직원 확정에 대해 다시 한번 안심을 시켰다.

'아니 이 사람들은 세상에 자기들 뿐인가? 왜 이렇게 일을 시키지? 자기가 내 상사야?'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도움을 요청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뻔뻔하게 사람을 들볶고 있던 것이다. 김작가와 미팅이 끝나고 나니 벌써 탑승할 시간이 됐다. 안내 방송이 흐르고 있었고 배우들은 미리 비즈니스 석으로 탑승을 한 후 스텝들을 챙기고 나는 마지막으로 탑승했다.

'아... 진짜 방송팀하고 나가기 싫었는데. 아니다.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자. 완벽하게 깔끔하게.' 신입 시절 해외 촬영에 땜빵으로 많이 다녀봤기에 얼마나 힘든지 알았었다. '즐겁게, 파이팅!'

보통은 통로 쪽으로 티켓을 끊었지만 이번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선택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쭉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안대와 목쿠션까지 준비했다. 촬영팀은 한쪽으로 몰아넣고 나는 반대편 창가 자리로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며 무거운 기체를 한껏 끌어올렸다. 내 마음도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생기고 있었다.


입국 심사가 끝나고 출국장 게이트로 나오니 유정이가 피켓을 들고 우리 팀을 반갑게 맞이했다.

"웰컴 투 말레이시아.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유정, 나와는 입사 동기로 말레이시아에 출장을 왔다가 이 나라에 반해 현지 직원을 자청해서 온 멋진 친구였다. 160은 넘을 듯한 키에 깡마른 몸매인 유정은 말레이시아 날씨에 익숙해진 듯 구릿빛 피부가 됐다. 동양적인 눈매에 쌍꺼풀 없는 눈, 작고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을 하고 있는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마른 몸에 비해 글래머러스한 부분도 있었다. 글래디에이터 샌들에 짧은 베이지 반바지와 올리브색 프린트 티셔츠를 입고 나온 모습이 대학생 같아 보였다.

유정은 나를 보며 작게 "언니!!! 진짜 이게 몇 개월 만이야. 언니가 온다고 하길래 일정도 바꾸고 내가 한다고 했지! 이따 호텔에서 얘기하자! 정말 정말 반가워."

"그러니까! 윽 너무 보고 싶었어. 내가 너 좋아하는 소주 잔뜩 들고 왔어."

"크크크 진짜! 잘했어! 못 살아!"

방송팀은 짐을 체크하고 있었고 배우들과 스텝들이 따로 이동할 벤으로 유정이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도와 인원 체크를 하고 호텔로 안내했다. 유정과 둘만 저녁을 먹고 싶었지만 저녁을 먹으며 내일 일정에 대해 다 같이 미팅을 해야 했다. 호텔 근처 유정이 안내하는 로컬 맛집에서 현지식을 맛있게 먹으며 3박 4일 촬영일정 미팅이 끝나고 일행을 모두 호텔로 돌려보냈다.


"언니, 우리 1차로 밖에서 한 잔 할까? 근처 괜찮은 칵테일바가 있어."

"그래, 그러자. 걸어가? 아님 택시?"

"택시 부를게 잠깐 기다려봐."

택시를 타고 10여분 정도 왔을까? 아주 근사한 칵테일바가 있었다. 우리는 그간 쌓였던 서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유정아, 한국으로 들어 올 생각은 없는 거야?"

"이곳에서 영어와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외국계 회사에 취업을 할까 생각 중이야. 즉, 한국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유정은 활짝 웃으며 말하다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언니, 남자 친구는 잘 있어? 둘이 잘 지내고 있는 거야?"

가은은 잔에 남은 애플마티니를 한 번에 들이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 그게 벌써 오랜 전 일이 됐네. 헤어졌어."

"그렇지? 맞네.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네."

"어? 뭘 봤는데?"

"한 달 정도 지난 거 같아. 내가 좋아하는 맛집에 점심을 먹으러 동료랑 갔었거든. 그런데 지호오빠가 있는 거야. 출장 온 느낌은 아니었어. 어떤 여자랑 같이 있는데, 꼭 신혼여행 온 거 같더라고. 그날은 우선 그 정도로 파악하고 가이드했던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나는 유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아. 이미 끝난 사이고."

"아니 언니 들어봐. 그 여자가 이미 임신 5개월이라고 했어. 쇼핑몰 운영하는데 들어가 보니 꾀나 유명하더라고. 중요한 건 지호오빠 얼굴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어. 내가 보기에는"

유정이 그날 그들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생각을 말하는 동안 그의 이상하리만치 우울해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나와 헤어지자고 한 건가? 너무도 뜬금없이 헤어지자는 통보를 하더니...'

"미친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여자가 연상이라고 했어. 4살 많다고 하더라. 뭐 얼굴은 돈을 많이 들였는지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더라고."

"유정아. 세상에는 모르면 약이 되는 일도 많은 거야. 그 자식이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 그날부터 난 잊었어. 물론 5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지, 힘들었지만 이젠 내 세상에는 그 인간은 없어."

"언니 많이 힘들었구나."

"어, 힘들었어.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았었거든. 그런데 난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어. 그저 받아들였을 뿐. 그런데 지금은 다 괜찮아. 그리고 난 지금 이 순간을 너와 함께 즐기고 싶다고." 장난치듯 웃으며 둘은 잔을 부딪혔다.

"유정아, 나 유학 갈려고." 칵테일을 더 시키려던 유정이 놀라 자리에 다시 앉았다.

"뭐? 유학? 왜? 어디로?"

"이미 준비하고 있었어. 새벽에 영어 학원 다니고 있고. 유학원에서 수속 밟고 있어. 영국으로 갈려고 해."

"아... 굉장히 갑작스럽네. 뭘 공부하려고?"

"나 원래 꿈이 방송 PD였거든. 영국은 공영방송국도 유명하고 프로그램 만드는 것도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 뭐라도 배우고 오지 않을까 싶어서. 도전해 볼까 해." 유정에게 계획을 말하다 보니 점차 자신감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두렵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강력하게 나를 이끌었다.

"난 언니의 도전을 응원해. 멋지다! 서가은. 나도 놀러 갈게."


인생은 허망하고 무의미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렇게 마냥 있을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살아져서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었다. 자기애로 나를 가득 채우고 순간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나쁜 일은 한 번에 태풍같이 왔었지만 그 잔해를 치우고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두려움 보다 희망과 설렘이 가득한 나를 위해.


이국적인 낭만이 가득한 칵테일바를 나와 택시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유정이 택시를 잡으려 손을 내밀었다. "Hey Taxi! Taxi!" 우리 쪽으로 오는 택시가 멈추려 할 때 두 명의 외국인 남자들이 택시에 올라탔다. 유정과 나는 황당한 나머지 그중 한 명을 택시 밖으로 끌어냈다.

화가 난 유정이 " 우리가 택시를 잡는 거 못 봤어? 우리 택시야!"

상대 남자가 말했다. "우리도 택시 잡고 있었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잡은 택시라고."

택시 기사가 내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남자들이 부른 택시가 맞았다. 우리는 너무 창피해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뒤에 있던 택시를 황급하게 올라타고 호텔로 출발했다.

택시에 내리면서도 그 황당한 일이 웃겨 깔깔거리고 있었다. 로비에 들어서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유정은 화들짝 놀라며 내 뒤로 숨어 버렸다. 아까 택시에서 억지로 내리게 했던 그 외국인 남자 둘이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런 젠장. 뭔 일이야.' 다른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진 않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너희들도 여기서 지내는구나. 아까는 좀 황당했어."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했어. 너희들이 택시를 부른 지는 몰랐어.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그 둘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우리는 어색함과 함께 구겨진 얼굴로 눈인사를 하고 숙소가 있는 층에 내렸다. 그들은 한 층 위에서 내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