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노크를 하세요.
#6
정신이 번쩍 드는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란 고양이처럼 침대에서 뛰어오르듯 일어났다. 유정과의 침대 사이 테이블은 전날 소주와 고추참치캔의 처참한 흔적이 장렬히 전사하듯 남았고 부스스 일어나는 유정은 그 증거였다. 우리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 조식을 우선 먹기로 했다.
“언니 난 이빨만 닦고 따라갈게 먼저 올라가서 먹고 있어.”
“알았어! 빨리 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출장 스케줄 중 하나는 호텔 조식이다. 아무리 스케줄이 빡빡해도 챙겨야 하는 조식. 여유롭고 우아하게 즐길 순 없지만 빈속에 아메리카노를 마실순 없었다.
‘우선 크로와상하나에 슬라이스치즈와 햄 그리고 약간의 샐러드…’ 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조급해진 발걸음을 옮기며 빠른 걸음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어제 유정이 거의 멱살을 잡듯 끌어내린 남자가 입구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아씨! 뭐야’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는척하며 슬쩍 돌아 뒤돌아서려는데 단단하고 탄력 있는 누군가의 가슴과 나의 이마가 강력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opps! Are you okay?”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매너 있게 부축하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I’m okay! okay”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뒤로 살짝 물러섰고 그때 유정이 나타났다.
“언니 여기서 뭐 해? 무슨 일 있어?” 유정은 나를 보며 달려오다 내 앞에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신속하게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눈길을 피했다.
“Aha! 너희들 어젯밤 그 갱스터! 맞지?” 나와 부딪힌 남자는 확인을 받기 전까지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각오로 우리 둘을 쳐다봤다. 민소매 탱크톱에 헐렁한 청바지와 가죽샌들을 신고 있던 그는 나와 부딪혀 왼쪽 샌들이 벗겨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컬이 있는 갈색머리를 뒤로 넘기며 그는 장난기 발동한 눈웃음을 지으며 유정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유정은 어젯밤에는 정말 미안했고 혹시 시간이 맞으면 칵테일이라도 한 잔 사겠다고 말하며 우리가 스케줄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다 한 후 내 손을 잡고 경보 선수같이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이지 않는 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초간단 스피드 모닝을 차려 먹고 아쉽게 조식을 끝냈다.
유정은 방송팀을 인솔하러 로비로 내려갔고 나는 말레이시아 사무실로 향했다. 본사에서 부탁한 자료 조사 및 현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부킷빈땅에 위치한 지사 사무실은 깔끔하고 현대적인 중심가에 있었다. 본사 직원의 방문으로 사무실 직원들은 마치 귀빈 영접을 하듯 깍듯하게 대해줬고 모든 자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지사장인 Alvin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현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던 경력자로 풍부한 인맥과 위기대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선한 인상을 풍기는 부리부리한 커다란 눈에 웃음기 있는 입술과 담갈색의 구릿빛 탄탄한 피부는 호감을 주는 부티나는 전형적인 성공한 화교스타일이었다. 나는 현지 직원들과 한 시간가량 미팅을 한 후 조용히 일 할 수 있는 책상으로 가서 노트북을 켰다.
Alvin은 점심에 식당 예약을 했으니 적어도 12시 전에는 일을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장난스럽게 명령조로 말하며 혼자 일 할 수 있게 미팅룸 문을 닫으며 나갔다. 이국적인 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사무실에 앉아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휴우... 하나, 둘, 셋..."
커피를 마시며 눈을 감고 숫자를 세는 것은 나를 리셋하는 기분이 들어 종종 하는 행동이다. '하아 좋다. 커피가 맛있네.' 커피를 홀짝이며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에 다다랐다.
사무실 풍경을 보니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점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밝은 미소를 띤 Alvin은 나를 보고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그를 따라나섰다.
Alvin은 정말 센스 있는 사람이었다.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정통 말레이시아 음식을 코스로 먹으며 화이트 와인도 한 잔 했다. 그는 오후 미팅 때문에 같이 사무실로 돌아가지는 못 했고 나는 한 시간 정도 일을 본 후 밖으로 나왔다.
문자 알람을 보니 유정의 메시지가 있었다. "언니 지금 이동하는 중인데 다음 장소에서 촬영하고 끝나면 7시 넘을듯해. 언니 배고플 텐데...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기다려. 오늘 진짜 맛있는데 갈 건데."
"알았어. 걱정 말고 촬영이나 잘하고 와. 난 본사 미팅 끝냈고 지금 호텔로 가려는 중."
"KLCC 공원하고 쇼핑몰 들렸다가 시내 구경 좀 해."
"알았어. 고마워. 수고해~"
공원은 사무실과 가까이 위치해 있어서 지도를 보니 걸어갈 수 있었다. 이국적인 건물들과 가로수, 시원하게 반짝이는 물을 뿜고 있는 분수는 출장 기분을 한층 더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나 여기 왔다.'라는 셀카 사진을 몇 장 찍고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와아... 너무 덥네. 어디 커피숍이라도 들어가야겠다."
근처에 쇼핑몰이 보였고 태양에 몸을 피하듯 건물로 들어갔다. 오후 3시는 공원을 산책하기 알맞은 기온이 아니었다. 넓은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눈에 띄었고 그 분위기에 이끌려 창가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켜고 리스닝 문제를 풀며 열대과일이 듬뿍 들어간 새콤 달콤한 주스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세차게 비가 떨어졌다. 지면의 보도불록도 녹일 듯했던 강렬한 열기는 시원스레 적셔졌고 테라스 옆 잔디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싱그러웠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감상하며 잠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비가 아니던가. 한국의 비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지만 이곳의 비는 나를 흠뻑 적시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비였다. 그렇게 비를 감상하며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서투른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그 사람은 나와 호텔 복도에서 부딪친 외국인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테이블에 혼자 있었고 나처럼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경계심은 풀지 않았지만 살짝 웃어 보였다.
"나는 에드워드 필릭스(Edward Felix)라고해. 내 소개가 늦은 거 같은데 이점에 대해서는 이유를 알고 있지?"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순수해 보였다.
"나는 서 가 은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라며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을 했다.
그는 국제조정경기에 관련해서 출장을 왔고 며칠 더 머물 예정이라 했다. 나와 유정의 대화를 듣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회의를 끝내고 잠시 일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왔다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점점 어색함은 사라졌고 자연스럽게 그는 자리를 내쪽으로 옮겨 앉았다.
시원하게 쏟아지던 비도 멈추고 하늘은 어느새 붉은 노을을 온 도시에 퍼트리고 있었다.
"아 진짜 아름답다."라고 말하며 필릭스를 보니 그는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고보 있었다.
"너도 진짜 아름답다."라고 말하며 갈색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의 눈은 초록빛이 감도는 옅은 갈색이었다.
"고마워"라고 말하며, 순간 나 또한 그를 너무 유심히 본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주스를 마셨다.
마침 유정의 업무보고 전화가 왔으며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니 화들짝 놀라 말을 잊지 못했다.
"여기 정리하고 호텔로 갈게. 이따 봐."
"언니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지금." 나는 전화를 끊고 호텔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도 부지런히 짐을 정리하고 나를 따라나서려는 듯 일어섰다. 우리는 택시를 함께 타고 호텔로 향했다.
"저녁에 시간이 된다면 같이 먹는 건 어때?" 필릭스가 말했다.
"친구랑 같이 맛있는 곳에 가기로 했는데. 어쩌지?"
"네 친구는 나도 아는 것 같은데 맞지? 보기보다 힘이 엄청 센! 마블에 나오는 히어로 같았어. “ 그는 마치 전 날 저녁에 친구가 택시에서 끌려나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듯 두 손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며 장난을 쳤다.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는 팁까지 챙겨주며 택시비를 내고 내가 완전히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문을 닫아주었다.
유정이는 목이 빠져라 나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뛰어나와 필릭스와 나를 번갈아 보며 둘 중 누구라도 설명을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안녕, 나는 에드워드 필릭스라고 해. 우리 초면은 아니지. 반가워."
"어, 나는 김 유 정이라고해. 반가워."라고 하며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언니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유정은 복화술을 하듯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말을 이어갔다. "필릭스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고 나는 너와 약속이 있다고 했지." 라며 말하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왔고 그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유정은 30분 뒤에 보자고 했고 로비에 내려가니 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정에게 택시에서 끌려 나왔던 남자가 우리 쪽을 쳐다보며 "안녕, 난 닐 그린(Neal Green)이라고 해. 좀 무섭지만 반가워."라고 하며 크게 웃어 보였다. 우리의 소개까지 끝나고 유정은 생각했던 저녁식사 장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하는 맛집이었다. 30여분 기다리고 우리 테이블이 생겼고 유정의 능숙한 현지어로 맛있는 음식을 시켰다. 닐과 유정이 약간 서먹하긴 했지만 음식이 맛있어서 시간이 금방 흘렀다. 필릭스와 닐도 아주 만족한 듯 보였다. 우리는 야시장을 가기로 하고 자리를 옮겼다.
필릭스가 우리에게 말했다. "내일 스케줄이 된다면 서핑하러 가지 않을래? 서핑을 못 해도 괜찮아 이곳 파도는 초보자들도 하기 좋거든."
유정은 나를 쳐다보며 "언니 내일이 마지막 날이지? 가서 서핑하고 와. 촬영팀은 걱정하지 말고." 라며 말하고 나를 잘 부탁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멱살이 아니라 진짜 혼이 날 거라고 짓궂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