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이대로 영원히

by 소원 이의정

#17

'계약할 당시 내가 필릭스를 만날 줄 알았나... 휴우.' 홈스테이를 두 달가량 하면 영국에 적응할 것이라 생각하고 계약했었다. 그런데 필릭스의 강력한 동거 제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유학원에서 문제없이 해결해 주었다. 골드스미스 대학원의 가을 학기에 맞춰 지금은 프리마스터 과정에 들어가 영어 공부와 미디어 관련 학과목 몇 가지를 미리 공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야 하는 서류가 어학시험 점수였는데 IELTS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어제도 늦게 까지 영어공부를 하느라 거실에서 꾸벅꾸벅 졸던 나를 필릭스가 침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필릭스의 출근을 거의 반쯤 감긴 눈으로 마주하고 짧은 입맞춤으로 대해줬다.

슈트 차림의 멋지게 차려입은 필릭스가 다가와 가은의 머리를 살짝 쓸어 올리며 입맞춤했다.

나는 눈을 비비며 그에게 미소 지었다.

"하이. 굿모닝."

'오늘은 문 앞까지는 가야지.' 빠르게 퍼플빛 실크 가운을 두르고 그의 등뒤로 달려가 안아줬다.

"잠꾸러기 아가씨! 오늘은 눈을 뜨셨군요."

"헤헤 아침에는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내일부터는 미라클 모닝. 요가도 좀 하고."

그는 내 오른쪽 엉덩이를 꽉 잡으며 입술에 키스했다.

"여기 도움이 되는 운동을 많이 해봐요. 다른 부분 운동은 내가 도울테니." 그는 찡긋 윙크했다.

"필릭스."

문을 닫고 나가려던 그가 다시 들어왔다.

"아. 가은. 다음 주 금요일에 핼러윈파티 있는 거 알지? 뭐 입을지 잘 생각해 봐. 그리고 학교 끝나면 내가 갈게. 저녁에 약속 있는 거 잊지 말고."

"핼러윈파티. 알았어요. 이따 봐요."


아침은 요거트나 바게트, 크로와상 또는 오트밀 같은 간단식으로 먹고 나가는 그는 항상 나를 위해 식탁 위에 과일을 준비해 놓고 나간다. 이렇게 자상한 남자가 또 있을까?

나는 그가 준비해 놓은 과일과 그릭 요거트를 먹으며 핼러윈 코스튬을 검색했다.

"푸하하. 이게 뭐야. 정말 이상한 코스튬도 많네." 핼러윈 관련 사진을 검색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핸드폰 상단의 시간을 보니 아뿔싸.

"어머. 늦겠다. 오늘 저녁 약속도 있었지. 뭘 입지..."

오늘 저녁은 필릭스의 직장 동료와 친구 세 쌍의 커플이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커플 모임이라니. 런던 와서 처음으로 필릭스와 나가는 사교 모임인데 뭘 입지?'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난번 쇼핑 때 자라에서 사둔 무릎길이의 골드색 랩스타일 새틴 원피스와 아이보리색 재킷을 걸쳤다. 마지막으로 베이지컬러 메리제인 펌프스를 신고 나니 마음에 들었다. '너무 차려입었나?' 학교에 좀 과하게 차려입은 느낌이 났지만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입고 나왔다.


학교 앞 '코스타' 카페로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후 기다리고 있었다.

"Hey, 가은. 오늘 수업 있어?"

나와 같이 미디어 전공을 할 이탈리아 친구 루치아였다. 그녀는 25세로 이태리에서 미디어 전공을 한 후 영국에서 석사와 박사를 공부하고 교수가 되겠다는 계획을 갖은 똑똑한 아가씨였다. 우리는 프리마스터 과정 오리엔테이션 첫날 맨 앞줄에 같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진 않았지만 굉장히 사교적이고 처음 본 나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걸어 주어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됐다.

그녀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클럽 가기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런던 근교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직은 남자친구 사귈 생각이 없다는 그녀는 다양한 남자들을 많이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Hi. 루치아. 어...(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 영어 보충 하려고 왔어. 점수가 안 나와. 미쳤어 점수."

"그랬구나. 난 도서관 왔어. 이따 저녁에 친구들하고 소호에 있는 하우스 클럽 가기로 했는데. 거기 DJ 음악선곡이 죽여준다는데. 가은 갈래? 오늘 차림이 딱! Nice."

"누구랑 가는데? 난 오늘 약속 있어."

"내 이태리 친구들하고 다른 학교 애들 몇 명. 브라질에서 온 남자애들인데 아주 괜찮아."

"그래? 잘 놀다 와. 오늘 펍에서 일하는 건 오프야?"

"오늘 쉰다고 했어. 가은은 어디가?"

"나 오늘 커플 모임 가는데. 너무 과한가?"

루치아는 나를 위아래로 쭉 훑어본 후 휘파람을 불었다.

"아마도 가은이 가장 예쁠 거 같은데. 다른 여자들은 나처럼 입고 나왔을 듯해."라고 말하는 루치아는 오래 신은 핑크색 컨버스 하이탑 스니커즈에 심하게 찢어진 스키니 청바지와 레이어드 한 티셔츠, 오버핏 베이지색 카디건을 멋스럽게 입고 있었다. 자연 곱슬머리는 길게 따아 묶고 핑크색 얇은 두 줄 헤어밴드로 포인트를 주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 정말 오버한 건데. 내가 사전 조사를 못 했어."

"가은. 걱정 마. You so beautiful. 그럼 월요일에 보자."

"그래. 루치아도 좋은 시간 보내."


어학실에서 IELTS 리스닝과 스피킹을 열심히 공부하고 캠퍼스를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갔다. 금요일에도 공부에 집중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나의 의상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잡고 리딩을 하고 있었다. 분명 나는 공부하던 중이었다.

'엄마가 싸주는 김밥과 어묵국. 정말 맛있지.' 이건 꿈인가?


필릭스는 외부 미팅이 일찍 끝났고 방송국에 다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는 가은의 학교로 출발했고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학생들 몇 명에게 물어보니 미디어학과 수업은 없다고 했다.

'가은 어디 있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그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가은을 찾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쭉 들어가니 창가 바로 옆 자리에 가은이 엎어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옆 자리로 가서 바라보니 예쁜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웃겨서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가은은 피식 웃는 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려서 살짝 눈을 떴는데 필릭스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노트에는 침을 흘린 채 화들짝 놀란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필릭스 여긴 어떻게?" 가은은 가방을 정리하고 그와 함께 도서관을 나왔다.

"어제 거의 못 잤지? 피곤한가 보네.." 그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라. 언제부터 있었어요? 창피하게. 아..."

"외부 미팅 나갔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그래서 그냥 왔어. 학교 후배 보려고. 오늘 왜 이렇게 이쁘게 하고 온 거야." 필릭스는 가은을 끌어안았다.


"가은. 오늘 커플 미팅 가면 좀 놀랄 수 있어. 아마 많이 놀랄거야."

"벌써 긴장되게 왜 그래? 누가 오는데?"

"가 보면 알아. 가기 전에 내가 공부하던 강당 보여줄까? 가볼래?"


필릭스는 원래 다니고 있던 캠브리지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중에 스스로 자퇴를 한 후 골드스미스 미디어 학과로 다시 입학했다. 그 이유는 부모님에 대한 독립이었다.

스스로 원하는 학과에 다니며 원하는 직업을 얻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와 캠퍼스를 둘러보다 강의실에 앉으니 갑자기 지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호와는 캠퍼스 커플이었던 오랜 기억이 불쑥 나왔던 것이다.

'갑자기 왜 지호 생각이 난 거야. 몹쓸 캠퍼스의 추억. 잘 지내겠지?'

"가은. 집에 차 세워두고 갈까? 시간도 많이 있으니까. 나 오늘 친구들하고 오랜만에 한 잔 할까 해."

"그래요. 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까?"

"아니. 지금 너무 예뻐. 차만 세워두고 나오자."

"근데 오늘 내가 왜 놀라는 거야? 누가 오는데?"

"그건 비밀." 필릭스는 장난기 있는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우리는 튜브를 타고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역에서 내렸다. 관광객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광장에 앉아 런던의 밤거리를 즐기고 있었다. 화려한 전광판에서는 광고가 돌아가고 광장 중앙에 있는 조각상에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버스킹 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듣다 보니 함께 리듬을 타며 즐거워했다.

필릭스는 내 뒤에서 나를 꼭 안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숀 멘데스- There's nothing holdin me back' 곡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필릭스와 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쩜 안정감일까? 상대에 대한 만족감일까? 이대로 시간이 영원했으면...'


우리는 손을 잡고 코벤트가든을 향해 걸어갔고 'The Punch & Judy'에 도착했다. 그는 테라스 쪽으로 나를 이끌고 갔고 그곳에는 OMG!

"꺄아. 유정아! 어떻게 된 거야."

"언니!!!" 우리는 두 손을 잡고 테라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껴안았다. 그리고 유정의 옆에는 활짝 웃고 있는 닐이 서있었다. 닐과도 격하게 껴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OMG! 유정. 언제 왔어?"

"런던 들어온 지는 이제 막 일주일 됐어. 이것저것 정리할 것들이 많았어. 오자마자 연락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니 좋다." 유정은 그간의 이야기들을 해줬고 여자들의 수다에 낄 틈이 없었던 남자들은 간단한 저녁 안주와 맥주를 주문하고 왔다. 잠시 후 필릭스의 직장 동료인 막스가 왔고 그의 상대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우리는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런던의 밤을 즐겼다.


막스가 내게 다가왔다.

"가은. 얘기 많이 들었어.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다. 너 엄청 예쁘구나."

"오. 막스. 고마워. 저번에 전화로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어. 맞아. 그 막스야. 필릭스같이 차가운 남자가 어떤 여자한테 녹았나 보니 엄청난데."

"필릭스가? 전혀 차갑지 않은데. 도대체 밖에서는 어떻길래."

"흠... 말도 거의 없고. 여자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아. 그래서 난 필릭스가 나랑 어울릴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더라고. 하하하 내가 잠시 흑심을 품었거든. 오해하지 마! 지금은 아냐."

'필릭스. 원래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가 아니라고? 나한테 하는 건 정말 스윗 그 자체인데.'

막스와 그의 파트너는 누가 봐도 잘 생긴 금발의 신사들이었다. '잘 어울리는 한쌍이군.'


유정은 닐의 열렬한 구애 끝에 런던에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전 직장 CEO 황민호의 친구 회사에 해외 영업부서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 그렇잖아도 대표님께 인사드린 마지막 날 나한테 명함 한 장을 줬거든. 그 회사에 들어갔다는 거야?"

"어. 대표님은 언니도 나가고 나까지 말레이시아에서 그만둔다고 엄청 서운해하셨어. 런던에서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니까 그 친구분 소개를 해주셨고. 이력서 보내자마자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 워킹 비자 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

"황대표님 정말 감사하다.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

"닐 하고 같이 있어. 캐나다워터에 집이 있는데. 우리 집에서 다음에 와인 한 잔 하자."

"그래. 그러자. 필릭스가 오늘 엄청 놀랄 거라고 하더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유정아 정말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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