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샬롯과 레베카

by 소원 이의정

#18

필릭스와 함께 지내며 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굉장히 규칙적이며 계획적이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우리가 잘 맞는 부분은 둘 다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는 지구력과 끈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도 나도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은 처음이라 각자의 공간을 인정해 주고 침범하지 않았다.

그는 회사에서 돌아오면 주식 차트를 보는 서재로 들어가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영어공부를 하고 영국 프로그램들을 섭렵하기 위해 TV를 열심히 보았다.

가끔은 필릭스도 나와 함께 거실에 있는 대형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영국의 문화에 대해서 해설을 곁들여주기도 했다.


오늘은 영국의 또 다른 문화 행사 중 하나인 핼러윈데이 이벤트가 있는 날이다.

핼러윈 이벤트를 참가해 본 일이 없는 나에게는 의상 선택부터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신중하게 고른 나의 의상은 '알라딘의 재스민공주'였다.

런던에 와서 처음으로 참가하는 큰 행사라 굉장히 기대가 컸다. 그리고 필릭스의 막내 동생 샬롯과 동료 화가들이 주최하는 갤러리 자선 파티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샬롯은 런던에서 떠오르는 젊은 화가로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팔린 그림의 모든 수익금은 희귀병 환자 아이들에게 기부될 것이었다.

지난번 필릭스 집에 방문하면서 샬롯을 보진 못했지만 내심 내 가족이라는 생각도 들고 뜻깊은 행사라는 생각이 들어 닐과 유정도 함께 가기로 했다.


"필릭스. 도대체 어떤 의상이길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궁금해. 빨리 나와." 그는 드레스룸에 들어가서 오랜 시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재스민. 잠시만 기다려.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하하."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닥터 스트레인지'였다. 양팔을 벌려 손동작을 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재스민. 오늘 나와 함께 어디든 갈 수 있지. 어디가 가고 싶소?"

"하하하. 필릭스 너무 웃겨요. 그런데 진짜 닥터 스트레인지 같아. 너무 잘 어울려요."

"가은도 너무 아름다워. 진짜 미치겠어. 너무 예뻐서."


우리는 샬롯이 말한 갤러리 앞에 도착했고 잠시 후 닐과 유정이 도착했다. 그들은 '아담스 패밀리-부부'로 분장하고 나왔다.

"언니. 핼러윈에 재스민 공주는 재미없잖아? 하하하. 필릭스 너무 잘 어울리는데."

우리는 서로의 의상에 맞춰 액션을 취하고 재밌어하며 즐겁게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필릭스는 여동생을 찾아 우리 일행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필릭스와도 많이 닮은 면이 있었다. 170cm 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깡마른 그녀는 아직도 소녀 같은 면이 보였다. 파티 주최자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아는 사람도 많았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캣우먼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레베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샬롯은 필릭스를 더 끌어당기며 레베카를 인사시켰다. 그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고 둘이 무슨 말이 오가는 것 같았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을 순 없었지만 필릭스는 살짝 미소를 뗬다.


'뭐지? 이분위기는. 샬롯은 필릭스와 내 관계를 모르는 건가?' 샬롯의 행동이 다소 무례하게 느껴지면서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샬롯과 레베카는 우리에게 인사하고 다른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었고 평소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많이 들떠있었다. EDM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쪽 부스에는 DJ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티 분위기는 무르익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을 찾기 위해 한적한 장소로 나왔다. 그곳은 사무실로 보이는 곳이 있었고 복도 끝으로 화장실이 보였다. 샬롯이 있었다.

"샬롯. 파티가 너무 근사하다. 그림도 너무 멋져."

"고마워... 이름이..."

"어. 가은이라고 불러. 서가은. 가은."

"그림에 관심이 많은가 봐? 가은"

"어 나중에 취미로 배우고 싶어서. 그림 그리는 거 좋아했거든."

"그래? 내 작업실 보여줄까?"

"여기 작업실이 있어? 어 보고 싶어."


나는 샬롯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작업실은 2층에 있었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어두운 공간이 나왔다. 그녀는 조명등을 몇 개 켰고 나는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며 작업실 공간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잠시 후 딸각하는 소리가 나고 샬롯은 사라졌다.

'어. 뭐지?' 나는 문쪽으로 뛰어갔다. 문은 밖에서 잠겨있었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기괴한 그림들과 설치물들이 있어서 일부로 만든 건 아니지만 핼러윈스러운 공포 그 자체였다.

작업실의 분위기는 나에게 공포감을 줬고 너무 무서워졌다.

'필릭스. 무서워. 제발... 나를 찾아줘.'

"살려줘! 살려줘!" 아무리 소리를 쳐도 1층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에 섞이고 말았다.


"유정. 가은 어디 갔어? 너무 오랫동안 안 돌아오는데." 그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화장실 갔는데. 가볼게요. 가방하고 핸드폰도 두고 갔는데." 유정은 급하게 복도로 나갔다. 화장실로 들어가 가은을 불러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아니. 어디 간 거야?' 유정은 갤러리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펴봤다. 어디에도 가은은 없었다.


유정이 가은을 찾는 동안 필릭스와 닐은 파티에 온 손님들을 돌아다니며 보고 있었다.

필릭스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데 레베카가 다가왔다. 그녀는 가면을 벗고 날카롭게 메이크업한 커다란 눈을 요염하게 뜨고 관능적인 몸매를 흐느적거리며 필릭스에게 위스키 한 잔을 주었다.

"필릭스. 어머님께서 이번 주 토요일에 티타임을 갖자고 하시던데. 우리 결혼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려는 것 같아. 나는 시간이 된다고 말씀드렸거든."

"그래? 난 처음 듣는 소리야. 그리고 난 스케줄 있어."

"아. 그럼 나만 보자고 하신 거였네. 신경 쓰지 마."

"레베카. 초면에 정말 미안한 말인데. 난 당신과 결혼할 생각 없어. 정중하게 사양해.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아 줘. 이만 바빠서."

"필릭스. 난 당신이 마음에 들어. 차갑고 섹시하고 도전적인 남자." 레베카는 고양이처럼 행동하며 필릭스의 망토를 잡아당겨 그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레베카. 뭐 하자는 거야." 필릭스는 화를 참으며 그녀의 양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은을 찾아 복도로 나왔다.

'필릭스. 매력적인데. 점점 재밌어지겠는데.' 레베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졌다.


레베카는 샬롯에게 다가가 술잔을 기울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샬롯. 필릭스와 극적으로 만났으니 아마 조만간 나를 잊기는 힘들 거야. 협조해 줘서 고마워."

"베카. 이제 가은을 데리고 내려와야 할 것 같아. 혼자 너무 오래 있었어."

"알아서 해. 그리고 샬롯 저 그림은 내가 살게. 가장 비싼 가격을 매겨봐. 네가 원하는 가격."

"고마워." 샬롯은 가은이 걱정됐다. 살짝 겁만 줄 생각이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혼자 작업실에 둔 것이 내심 불안했다.


필릭스와 닐 그리고 유정은 갤러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비슷한 의상을 입은 여자들만 보면 다가가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하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겁 많은데. 필릭스. 언니는 공포영화도 못 봐요. 혼자 돌아다닐 사람도 아닌데."

"유정. 닐 하고 저쪽 다시 한번 찾아볼래? 뭐 사러 갔을 수도 있잖아. 주변 샵 좀 봐줘."

필릭스는 갤러리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가은을 찾고 있었다.

'가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미치겠네.'


샬롯은 2층으로 가려던 중 다른 친구들이 불러 그림 설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가은을 잊고 있었다.

필릭스는 다급하게 들어와 샬롯에게 갔다.

"샬롯. 너 가은 못 봤니?" 그의 말에 아차 싶은 샬롯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니. 어딜 간 거지? Shit!"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오빠를 본 샬롯은 빨리 가은을 풀어주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 나도 찾아볼게. 기다려봐."

샬롯은 다급하게 2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가은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닥을 보니 그녀가 쓰러져 있었다.

"웁스. 어쩌지. 젠장! 쇼크 받았나?" 그녀는 다급하게 필릭스에게 전화했다.

"오빠. 2층 작업실로 와봐. 여기 가은이 쓰러져 있어."

필릭스는 단숨에 뛰어들어왔고 차갑게 식어 있는 그녀의 몸을 손으로 쓸며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이후 유정과 닐도 뛰어들어 왔다.

"이렇게 얇은 옷을 입고 있으니... 가은. 가은. 정신 차려. 닐 택시 잡아. 병원에 가야겠어." 필릭스는 외투를 벗어 가은을 덮어주고 꼭 안아 그녀의 차가운 몸을 녹여주었다.

유정이 옆으로 와서 가은에게 위스키를 약간 마시게 했다.

"언니. 가은언니. 정신 차려. 언니!" 유정은 가은을 흔들었다.

가은은 약간 정신이 들었다.

"필릭스..."

"가은.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어. 그게. 가은이 작업실이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작업실을 보여주려고 올라왔는데. 동료가 급하게 찾는 거야.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작업실 문을 잠근 거지. 우리 작업실 도난 사고가 많았잖아. 오빠도 알듯이. 가은 미안해. 일부로 그런 건 아냐."

"가은. 일어날 수 있겠어?"

"어... 필릭스. 나 너무 추워. 우리 집으로 가자."

"응급실 가야 하지 않을까? 그냥 집으로 가도 괜찮겠어?"

"어. 집으로 가."

필릭스는 차갑게 식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 모습은 마치 영웅이 미녀를 구한 듯한 모습이었다. 쿵쾅거리는 음악과 레이저 빔을 뚫고 그는 예약한 택시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