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은 사양합니다.
#19
할로윈데이때 정신이 없었던 나는 이후 당시 상황에 대해서 따지지 않았다.
그는 그 일 이후로 샬롯과 전화로 크게 싸웠고 난 그런 그가 나 때문에 가족들과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안한 감정이 더 컸다. 그렇지 않아도 나로 인해 어머니와 소원한 사이가 된 것도 내심 죄책감이 들었는데 이젠 여동생까지 멀어진다면 나는 정말 천하의 악녀가 되는 거 아닌가?
필릭스의 눈치를 보며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에 신경이 쓰였던 나는 그가 좋아하는 저녁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가 신경 쓰는 것도 많았고 약간은 우울한 감정을 숨기는 듯하여 특별한 만찬을 준비했다.
성인샵에서 산 섹시한 그물 스타킹과 레이스로 꾸며진 샤틴 원피스를 입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저녁 테이블 세팅을 했다. 레드와인 잔을 테이블에 놓으려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의 엄마가 복도에 서있었다.
"헉. 어떡하지." 나는 급하게 샤워가운을 두르고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필릭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녀는 못 마땅하다는 듯 경멸의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뭐 오히려 잘 됐다. 같이 있으면 좋았지만 너한테 얘기하고 가야겠다. 필릭스와 레베카 다음 달에 약속식 할 거다. 너의 동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필릭스의 동의가 필요한 것도 아냐. 그러니 너는 네 길을 가. 더 이상 필릭스 옆에 들러붙지 말고."
"네? 아니..."
"분명히 말한다. 필릭스는 정혼자가 있었어. 그 아이 인생에 끼어들지 마. 부탁한다. 저번에 네가 그랬지? 꿈을 이루기 위해 영국에 왔다고. 네 꿈을 찾아 그 길을 가라.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냐. 너는 우리 집안과 어울리지 않아."
그녀는 주변을 살펴본 후 말 없는 나를 쳐다보았다.
"필릭스한테는 내가 전하마. 왔다 갔다고 전달해도 좋아. 내가 한 말 명심하기 바란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후 나는 그저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옷을 갈아입고 무작정 짐을 쌓다. 짐을 싸고 어디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이 집안의 공기가 숨 막히게 나를 누르는듯했다.
템즈리버 강변을 걷다 보니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발이 가는 대로 가고 있었다.
그의 전화가 울렸다.
내가 받지 않으면 온종일 걱정하고 잠도 못 잘 그였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를 남겼다.
'필릭스. 어머니 왔다 가셨어. 다음 달에 당신과 레베카 약혼식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당신 인생에 장애물이 된 느낌이야. 어머님 말씀이 맞아. 난 당신과 맞지 않아. 난 걱정하지 마.'
그의 문자가 바로 왔다.
'가은. 무슨 말이야. 내가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잖아. 난 너뿐이라고. 왜 못 믿니? 어디야? 빨리 들어와.'
그의 답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쓰고 지우 고를 반복하다 그에게 답변을 했다.
'필릭스. 지금은 힘들 수 있어. 그런데 시간을 갖자. 난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한다는 말을 믿어. 만약 우리가 그래야 한다면 난 괜찮아. 당신이 가족들과도 잘 지내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가은아. 부탁이야. 만나서 얘기하자. 어디야?'
나는 답변하지 않았다.
"유정아. 나..."
"언니. 무슨 일 있어? 울어?"
"나... 너네 집으로 갈 수 있어? 나 갈 데가 없어."
"그래 빨리 와. 기다릴게. 지금 어딘데?"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그런데 찾아갈게."
"언니. 우선 튜브 타고 '캐나다 워터'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오면 테스코 있을 거야. 거기까지만 와. 내가 나갈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집 앞 강가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달 빛이 비치는 흐르는 강물을 보며 나는 진정이 되었다.
"언니. 필릭스에 대한 사랑이 고작 그 정도야? 도망가지 말고 맞서야지. 필릭스에 대한 의미가 언니에게 얼마만큼인 거야?"
"난. 그가 행복하길 바라."
"그가 행복한 게 뭔데?"
"모르겠어."
"에휴... 언니."
유정은 따뜻하게 나를 맞이해 줬고 내가 집을 알아보는 동안 그녀의 집에 머물 수 있었다.
유정은 필릭스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니 우리 집에 있어요. 걱정하지 마요.'
Dear. 가은.
내가 가은을 보았을 때 마치 세상에 오직 너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가은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내 마음이 너에게로 훅 빠져드는 것을 느꼈지.
너의 외모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당신만의 독특한 매력이 나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했어.
말레이시아 바에서 울리던 가은의 웃음소리는 마치 천사의 노래 같았어.
그날 이후 나의 머릿속은 너로 가득 차 있었고, 가은과의 모든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끝없는 상상을 펼쳤지.
이런 설명으로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이 전부 전달될지 모르지만 나의 진심이야.
가은을 만났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느끼는 어떤 감정과는 달랐어.
마치 나의 마음이 파도같이 뒤흔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나는 혼란스러움과 동시에 흥분을 느꼈어.
다시 가은을 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며, 마음속에서는 너와의 우연한 만남을 기대했어.
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거든.
너는 나에게 인생 전부야. 제발 이렇게 떠나지 마.
가은아. 너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From. 너의 마지막 사랑 필릭스.
필릭스로부터 메일이 왔다.
나는 학교 도서관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필릭스 집에서 나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나는 그저 도망치기만 하는 겁쟁이인가?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일까?
내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와 함께 견뎌야 할까?
스스로 질문이 쏟아졌지만 정답은 없었다. 그의 진심을 담은 편지는 내 가슴을 울렸다.
난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그는 바로 받았다.
"가은. 가은아. 어디야?"
"지금은 학교예요. 좀 전에 메일 읽었어."
"어. 메일 받았구나. 내가 표현이 서툴러.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전부 표현 됐는지 모르겠어. 가은아.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학교로 갈게."
한 시간 뒤 그와 학교 앞에서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힘껏 끌어안았다.
"가은아. 너무 보고 싶었어." 그의 눈시울도 붉어져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이 떨어질듯했다.
"필릭스." 나는 울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눈물이 대방출되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고 내 입술에 키스했다.
"가은. 가자. 이럴 필요 없어. 우리 서로 머리를 맞대고 좋은 생각을 해보자. 이렇게 도망가는 건 비겁한 짓이야. 방법이 있을 거야."
"난 두려워. 필릭스. 내가 견딜 수 있을지."
"혼자 견디는 거 아니잖아. 내가 함께 있을 거야."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그의 차로 걸어갔다.
어머님이 오셨던 날과는 날리 그의 집은 예전의 그의 체취가 있는 모던한 분위기로 나를 반겼다.
익숙하고 아늑한 그의 침실이 그리웠다. 그와 둘이 꼭 안고 잠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너무도 그리웠다. 아침이면 내 이마에 키스하고 예쁘게 차려진 과일 한 접시를 보고 싶었다.
거품 목욕을 하며 와인 잔을 기울이던 우리의 모습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의 방 침대에 몸을 기대는 나에게로 그가 다가왔다.
"너무 그리웠어. 필릭스."
그는 다가와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우리는 서로의 옷을 빠르게 벗긴 후 달아오른 몸을 탐닉했다.
그의 탄탄한 복근과 골반이 너무 섹시했다. 그의 단단한 팔을 타고 올라가 불뚝해진 어깨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달콤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나에게로 들어온 그는 나를 꽉 안아주었다.
"가은. 레베카와 약혼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잘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
"어머님. 어떻게 설득할 거예요? 둘의 약혼식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셔서. 밀어붙일까 봐 걱정이야."
"그럴 순 없어. 내 인생이야. 그리고 난 인생을 함께 할 사람이 있잖아. 가은."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살포시 키스했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짧다 해도 그가 하는 노력만큼 나도 노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이 사람은 온통 내 생각뿐인데. 그에게 악역은 적어도 내가 되지는 말아야 했다.
"필릭스 특별 샌드위치 배달되나요?"
"오. 필릭스 샌드위치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공주님."
그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의 다정한 눈빛과 행동 스위트한 말투도 너무 그리웠다.
'그래. 그를 믿고 기다려보자. 두려워하지 말고. 나도 그를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