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베이스 기타 선율을 타고

by 소원 이의정

#22

혼인 서약서 사인을 한 후 우리 커플과 닐, 유정은 예약해 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후 나는 혼자 다트머스로 향했다. 하루 동안에 이렇게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든다니.

방금 전까지 그렇게 행복했던 내 마음은 어느새 꽉 막혀 움직일 수 없는 도로에 서있는 자동차 갔았다.

그녀는 집에 들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유정과 함께 브릭레인 빈티지 마켓 쇼핑을 다녀온다고 했다.

집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마치 긴장감과 불안함 속에 있는 답답한 느낌일 것이다.


어머니께 미리 집으로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집 앞에 못 보던 차가 주차된 것을 보며 왜 불길한 예감이 어김없이 맞는지 알았다.

붉은색 아우디 A7이 반짝거리며 서있었고 아마도 레베카 차 같았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어. 필릭스 왔니. 잘 됐네. 레베카와 차 마시고 있었다."

"필릭스. 왔어요?"

응접실 소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레베카는 너무도 뻔뻔하게 요조숙녀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하. 도대체 이 여자 무슨 꿍꿍이인 거지?'

"레베카가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는구나." 린다는 의기양양해서 레베카를 보며 미소 지었다.

필릭스는 그녀를 의심에 찬 눈빛으로 쳐다봤다.

"필릭스의 와인회사 '와인 벨리(Wine valley)'의 미국 유통을 책임질 거물급 인물을 섭외했거든. 그쪽에서 많이 관심 있어해." 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께서 원하는 아들이 되고 싶었지만 이제는 제 삶을 잘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저 오늘 가은과 혼인서 사인하고 오피스에서 오는 길입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린다는 고함치듯 "뭐라고!" 외치며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레베카는 휘청거리는 린다 쪽으로 걸어가 그녀를 부축했다.

"너. 너. 기어코. 필릭스. 도대체 어쩌자고."

"어머니. 저와 가은 허락해 주세요. 저도 너무 괴롭고 힘들어요. 도대체 가은이 왜 안 되는 겁니까? 저와 레베카가 결혼하면 어머니 행복하세요? 저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하십니까?"

"필릭스 너. 정말 나 죽는 꼴 보고 싶니! 그런 거야!" 소리를 치는 린다는 고혈압 약을 먹고 있는 성인병 환자였다. 레베카는 린다를 진정시키며 필릭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저를 용서 못 하신다면 어머니께서 저를 용서하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죄송해요."

그는 린다의 얼굴을 살펴본 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의 등뒤로 소리 내어 울고 있는 린다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브릭레인에는 피시 앤 칩스로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가 있었다. 주변 길에 앉아서 또는 서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음식을 시킨 후 생선 튀김에는 레몬을 뿌리고 칩스에는 비니걸(식초)을 뿌렸다.

"와아. 아는 맛인데 여긴 더 맛있네. 언니. 여기 진짜 대박이다."

"진짜 맛있다. 필릭스가 추천한 맛집 잘 찾았다." 우리는 흐뭇해하며 언제 점심을 먹었냐는 듯이 맛있게 먹었다. 배가 부르니 빈티지 샵들을 들어가도 여유로운 마음이 들었다.

런던 신세대들이 찾는 빈티지 성지답게 꾀나 감성적인 옷가게들이 많았다.

어떤 샵 안에서 작은 파티가 열리기도 했고 런던의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 나까지 감성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 우리 다음에 오면 세계 푸드 마켓에서 점심 먹자. 맛있는 거 진짜 너무 많아."

"그래. 난 멕시코 음식에 도전하고 싶다. 저 사람 시킨 거 봐봐. 엄청 맛있어 보여."

"어! 그러네. 맛있어 보이네." 유정은 내가 가리킨 사람 쪽으로 걸어가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한테 그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언니. 우리 회사 윤태호대표님 전 직장 황민호대표님 친구분이야. 이쪽은 서가은씨 얘기 들으셨죠?"

"아. 민호한테 전에 얘기 들었었죠. 이렇게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그는 옆에 있는 냅킨으로 손을 닦은 후 나에게 악수 신청을 했다.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두 분도 같이 드실래요?" 그는 두 명의 외국인 일행과 함께 있었고 우리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대표님 저희는 100년 전통 피시 앤 칩스 먹었어요. 드세요. 저희는 갈길 갈게요."

"아. 저기... 유정 씨. 우리 잠시 후에 밴드 공연 가거든. 같이 갈래? 바쁘면 어쩔 수 없고."

"네? 공연이요? 누구 공연인데요?"

"그게. 우리. 우리 공연. 여기 이 친구가 보컬이고 저 친구는 키보드 그리고 난 베이스기타."

"와아! 대표님이요? 진짜요?"

"우리 여기서 먹고 커피 한 잔 하면서 이동할 거거든. 이 근처야."


밴드 활동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 윤태호는 상남자 같이 생겼던 전 직장 황민호대표와는 반대로 쌍꺼풀이 없는 크고 긴 눈을 갖은 미소년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웨이브진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의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음악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닥터마틴 워커에 청바지 체크무니 셔츠를 레이어드 한 패션 센스와 검정 가죽 재킷을 입은 그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런던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믿길 정도로 이국적인 이미지가 풍겼다. 무심한 듯 시크해 보이는 이미지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스러움이 느껴졌다.

오늘 공연은 사회인 동호회 세 팀이 나와서 각각 다섯 곡 씩 부른다고 했다.

티켓값은 10파운드였고 공연장 펍에서 원하는 음료 또는 술을 먹을 수 있었다.


"언니. 가보자. 공연 보고 싶다."

나는 조금 망설여졌지만 오랜만에 공연을 본다는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한 후 그들의 연습실로 함께 걸었다. 그들은 런던 경영대학원 MBA 과정 동기들이라고 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유정이 옆에서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니 윤대표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멤버 중 보컬은 영국인이고 한 명은 독일인이었다. 한마디로 다국적 그룹이었다.

그들이 부를 다섯 곡을 차례대로 연주하며 곡이 끝날 때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제안하는 모습이 뮤지션 같아 보였다.

첫곡 'In my blood'를 시작으로 'Lonely Boy', 'Shotgun', 'Leave a Light on' 마지막 곡은 'Are you Gonna be my girl'이었다.

베이스 기타를 치는 그의 모습은 자뭇 진지했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마음속에서 콩닥거리는 어떤 피의 흐름이 심장으로 향하는듯했다.

'Are you Gonna be my girl' 연주에 심취한 얼굴과 손놀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연주가 끝날 즈음 그는 나를 보고 씽긋 윙크했다.

유정은 그들의 리허설에 흠뻑 심취했고 마지막 곡의 탬버린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탬버린 파트를 맡은 유정은 공연의 기쁨에 부풀어 있었다.


"언니, 아마추어 그룹이지만 구성 참 괜찮네. 멋지다 그렇지?"

"어... 어 그러게 대표님 기타 엄청 잘 치신다."라고 말하며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한 곡씩 연주가 끝난 후 그는 악기를 잘 내려놓고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휴우. 어때요? 들을만해요?"

"와아! 대표님. 이렇게 숨은 능력자였다니. 멋지세요. 회사에서는 엄청 일만 하시더니."

"하하하. 대학 때부터 밴드 동아리 활동을 했었어. 워낙 팝송을 좋아해서. 이 친구들하고 밴드 결성해서 취미로 한지는 이제 3년 됐네."

"오래전부터 밴드 활동을 하셨군요. 이런 취미가 있다는 건 부러워요." 가은이 말했다.

"가은 씨는 취미 없어요?"

"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아직 여유가 없어서 다시 시작은 못했고요."

"그렇군요. 가은 씨가 그린 그림 보고 싶네요." 한대표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얼굴로 가은을 쳐다보았다.


가은의 전화기가 울렸다.

"어. 필릭스." 가은은 밖으로 나갔다.

"가은. 나 런던 도착했는데. 전화를 계속 안 받길래. 아직도 브릭레인이야?"

"마침 아는 분이 여기서 공연이 있다고 해서 보려고 했어요."

"그래? 어디야? 곧 갈게."

위치를 알려주자마자 필릭스는 황급히 출발했다.

공연은 8시부터 시작이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1, 2층으로 된 펍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1층에 작은 무대가 마련된 곳으로 첫 번째 공연팀이 올라갔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펍을 비집고 들어온 필릭스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와 꼭 안아주었다. 마치 오랫동안 못 본 사람처럼 한참을 안고 귀에 속삭였다.

"가은 사랑해."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무슨 일은. 그런 거 있잖아. 너무 보고 싶었던 당신을 보니 안도감이 들면서 행복해지는 느낌. 아. 유정은?"

"유정은 잠시 후에 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공연이 무르익으면서 마지막 팀으로 윤태호 밴드가 나왔다. 그들의 연주곡 중에서 'Shotgun'은 베이스 기타가 독보이는 무대였으며 노래도 같이 부르는 윤태호는 많은 여성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유정의 탬버린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마치 기존의 멤버같이 호흡이 착착 맞는 실력을 뽐냈다. 그들의 마지막 곡 'Are you Gonna be my girl'에서 유정과 멤버들은 최고의 갈채를 받았다.

윤태호는 연주하는 내내 가은을 쳐다봤고 그의 옆에 있는 필릭스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과 열정적인 무대 사운드에 흠뻑 취한 이곳의 에너지는 폭발직전이었다.

펍 전체가 들썩이는 연주가 끝났고 사람들의 앵콜 함성에 못 이겨 그들은 회의 끝에 'Youngblood'를 시작했고 관객들의 떼창으로 휘날래를 장식했다.


"언니. 나 봤지? 이래서 무대에 서나 봐. 진짜 재밌다."

"엄청났어. 팀원으로 투입되는 거야?" 유정과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윤태호가 옆으로 오며 필릭스에게 도전적으로 악수를 청했다.

"윤태호입니다. 반갑습니다." 태호와 필릭스의 눈빛 사이에는 전기가 튀는 듯이 긴장감이 흘렀다.

"네. 반갑습니다. 가은의 피앙새 필릭스라고 합니다."

"필릭스. 탬버리 연주하는 거 봤죠? 윤대표님 저도 팀원 해야 하는 건가요?" 유정은 팽팽한 긴장감을 깨기라도 하듯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농담을 했다.

"윤대표님, 연장근무 페이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은이 말했다.

모두는 호탕하게 웃었고 태호는 다른 친구들 무리로 걸어갔다. 그들과 대화하며 그는 계속 가은 쪽을 쳐다보았다.

'Are you Gonna be my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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