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화랑 Jul 22. 2021

기계적 중립과 라인업 변화

언론인들이 늘 고민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기계적 중립.


대한민국 언론이 저마다의 논조를 가지고 있지만, 특정 논제에 대해 두 파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발전적 방향이 아닌, 싸우기 위한 논쟁에 지친 독자들은 저마다의 '중립'을 지키는 언론을 찾고자 한다. 

언론인들도 안다. 하지만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견은 나뉜다.


기사에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취재를 바탕으로 한 근거가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 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언론의 논조, 의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1면에 배치할 것인지, 15면 사이드에 배치할 것인지에 따라서 그 언론의 의도를 잡아내기도 한다. 따라서 아무리 기사를 중립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중립으로 만들어지기 힘들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집단들의 이야기를 모두 만족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기사를 쓴다는 것은 곧 핵심을 놓친다는 것이기도 하다.  

   

기계적 중립은 언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서도 존재한다.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절대적 중립 관점에서 소신을 지키고자 하더라도 양 쪽 모두에게 적이 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주의'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말이다.     


과거 언론인을 꿈꾸며 기계적 중립을 고민했던 때가 떠올랐던 이유는 놀랍게도 야구를 곁에 두면서다. 하나의 수비 포지션을 두고 두 선수를 번갈아가면서 쓰는 것(플래툰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이 과연 올바를까? 라는 생각을 했다.      


보통은 '더 잘하는 선수'가 자리를 차지한다. 중립과 무관한 얘기다. 1:1로 비교를 하면 누군가 더 비교우위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단 여기서 실력 이외의 요소가 들어가게 된다면 어떨까. 마치 언론사에서 스폰서의 광고가 기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지난시즌 A 선수와 B 선수는 내야에 가장 중요한 보직인 유격수를 놓고 부딪힌다. 두 선수 모두 절대적 실력으로는 훌륭한 선수들이다. 감독도 이를 알기에 두 선수를 모두 기용하고 싶어한다. 단 한 선수는 유격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을 맡아야만 한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중립'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유격수라는 자리를 절대적으로 부여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경기마다 번갈아가며 그 자리를 맡겼다.     


이유를 묻기 전 결과를 들여다보면 썩 좋지 않았다. 어느 한 쪽에게도 수긍을 못했다. 50:50으로 출전을 배분하니 양 쪽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팬들도 자주 바뀌는 라인업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흔히 보지 못하는 장면에 대한 결과가 실책으로 이어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과정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배경은 이렇다.     


커리어적으로 더 뛰어난 유격수 A는 많은 시간 유격수로 뛰었던 시간이 자신이 출장해야되는 근거였다. 반면 B는 커리어만 놓고보면 유격수, 3루수를 오갔지만 시즌 후 거취문제 등으로 자신의 가치를 더 높여야만 하는 선수다. 즉 유격수로 이번 시즌을 보내는 것이 개인, 구단 입장에서도 가치를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를 놓고 감독은 결정해야만 했다.  


   

흔히 생각하기에 기계적인 중립을 맞추는 것은 양 쪽 입장에서 최악의 수를 없애주기 위함일 것이다. 둘 다 차선을 택해 자신은 한 쪽의 입장만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면피용으로도 보여질 수 있다. 조직 어디에서나 리더는 자신의 역량을 일선에서 발휘하기 보다는 조직 내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설득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      


설득 과정에서 양 쪽 모두에게 중립적 조건으로 제안하면 설득 당시에는 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수긍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긴 힘들다. 오히려 리더 밑에 있는 구성원은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던가", "나를 이끌어보시던가"의 입장일 때가 많다.      


다수의견에 대한 소수의견을 들어주는 것과는 다르다. 엄연한 다수의견이 존재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그림을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5:5를 지향하는 기계적 중립은 그렇지 않다.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매일같이 변형한다. 아이돌 보컬 프로그램에서도 그렇지 않는가. 4명의 그룹이 있고, 4명이 모두 보컬이 뛰어나더라도 메인보컬은 분명히 정해줘야 한다. 안 그러면 그 그룹의 색깔을 자칫 잃어버릴 수 있다.    

  

색깔을 입히고, 그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기계적 중립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서 AI처럼 5:5를 지킬 수 없는 것은 물론이며, AI가 결정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AI가 아니다.   

  

기계적 중립을 지향하는 사례가 있다면 EU에 처음부터 가입되지 않았던 스위스 사례를 들고 싶다. 이 사례가 반례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두가 찾는 '중립국'이기 때문이다. 국가간 분쟁이 생겼을 때 중립국이라는 이유로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도 않고,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꿋꿋이 소신을 지킨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특정 편을 들지 않는다'. 즉 표현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중립을 지키는 것이다. 중립을 지키는 스위스 대신 다른 국가를 끌어들여 결국 다수와 소수가 맞붙는 구도인 것은 같다. 중립국이 그 결정을 종지부 찍어줄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 대한 결정을 지어야하는 리더는 중립국 위치에 설 수 없다. 결정할 때는 외롭더라도 그 외로움을 이겨내 과정, 그리고 결과로 수긍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고독한 자리다.    

  

치킨처럼 반반무많이가 되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사람이 말로, 글로, 행동으로 '표현'하는 행위에는 반반이란 없다.

그래서 비언어적 표현이 중요하고, 분위기, 뉘앙스, 설득, 심리에 대한 공부가 계속 이뤄지는 것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