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렇게, 전우애라고 하시더라

당신은 왜, 결혼을 '선택'하셨나요 - 2

by 감성공대
"다 그래, 인제 정으로 사는 거야
전우애지 전우애."


참 이상한 것도 물어본다는 듯, 무심하게 한 잔 털며 대답하는 선배의 눈빛을 알듯 말듯하다. 무슨 의미일까.


"전우애요? 아니 그..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니에요?"


"맞지."


"이제는 사랑 안 해요?"


"사랑해. 하는데, 그.. 뭐냐.. 결이 달라 결이.

아 사장님 저희 여기 소주 한 ㅂ.. 감사합니다."


건네받은 소주병을 따며 턱짓으로 내 잔을 가리킨다.

내밀어진 잔에 가득 부어지는 술과 내 표정을 번갈아 살피더니 이내 자기 앞에 놓인 잔을 채우며 말한다.


"너도 나아-중에 결혼해봐라. 내 말이 뭔 말인지 알 거다."


지독하다. 속 시원히 말해주면 될 걸 가지고 괜히 사람을 골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알듯 말듯한 저 눈이 미치게 한다.


입사한 지 갓 1년이 넘어간 신입사원인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은 너무도 사랑하는 두 인생이 서로를 합쳐 새로운 하나의 삶을 빚어내는 것이라고, 이제 둘은 평생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결혼생활은 사랑으로 가득 찬, 흔히들 말하는 '장밋빛' 생활이어야 하잖은가. 아니, 솔직히 연애도 오래도록 만나면 권태기가 찾아오기도 하고 익숙함이 설렘을 대체하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니 항상 장밋빛으로 차있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평생을 함께하기로 다짐한 데에는 그만한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전우애'라니. 말도 안 되는 농담이다. 연애보다도 더 못하다면 왜 결혼을 하는가. 자주 상대를 바꾸며 항상 설렘이 가득한 연애를 하고 말지.


"아-이, 무슨 전우애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크리스마스 이브날,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춘기 소년처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 해보니까 이런 게 좋더라.' 그게 아니면, '솔직하게,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혼자도 나쁘지 않다. 이런저런 게 안 좋네.' 뭐 이런 것들 이어야죠. 지금 솔직하게 후자에 가까운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자친구 남자친구도 오래 만나면 권태기도 있고 익숙해지기도 하고 해서 설렘도 사라지고 많이 싸우고 하잖아요. 그래도 전우애라는 말을 들으면 서운해하시겠는데요. 뭔가 너무 정 없어요."



"행님, 행님!"


"어?"


"아 뭐해요 빨리 받아요. 똑바로 대답도 안 해주고"


언제 비었더라.


"그래서 결혼하면 때요?"


"결혼한 지 2,3년밖에 안 된 내가 결혼생활 뭐 알겠노."


"그래도 가족이 생기고 딸도 있고 하면 뭔가 다를 거 아녜요. 어때요? 결혼하니까 좋아요?"


다르다. 혼자 지내던 생활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결혼하기 전에는 퇴근하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냉기가 감도는 어두운 집에 들어가 불을 켜고, 티비를 켠다. 티비에서 들리는 사람소리만이 유일하게 이 집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퇴근하고 혼자 집에 들어가는 남자 동생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자주 술이 아니어도 곧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곤 했었다.


요즘 집에 들어가면 '아빠 왔다'는 말과 함께 아무것도 모르고 뽈뽈 기어 다니는 딸아이가 빵긋 웃어주며 나를 반긴다. 아내는 저녁을 준비해서 먼저 먹고, 나는 이유식을 먹이고 씻기고 바톤터치. 아내가 말려주고 로션 발라주고 옷 입히고 나는 그 사이 저녁을 먹고 설거지 청소 빨래 필요한 게 있으면 해치우고 아내가 아이를 재운다.

처음엔 내가 재워도 잘 잤지만 이제는 내가 옆에 있어도 엄마를 찾는다. 재우고 나면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서로를 토닥인다. 좀 더 정리할 게 있으면 같이 조용조용히 처리하고. 한 번에 잘 자는 것도 아니라서 깰 때마다 아내는 아이 옆에서 힘들게 재운다. 정신 차려보면 10시가 훌쩍 넘어간다. 요만한 아이가 있는 집 생활은 모두 비슷할 테지만 조용히 티비소리만 울리던 집이 생각나기도 한다. 정신이 없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낼 뿐이다. 나도, 아내도. 아이가 일찍 생기니 신혼이, 우리 둘만의 시간이 너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쉽기도 하지만 싫지도 않다. 딸아이를 보고 있으면 좀 더 일찍 만나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아내와 둘만의 시간이 없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교차하며 복잡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래도 딸아이는 이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다.


아이가 없었다면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을 테니 손쉽게 연애 생활과 비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야, 연애보다 이런 건 훨씬 좋아' 혹은 '결혼해서 같이 사니까 이런 건 좀 연애 때보단 별로.'라고 이야기를 했겠지. 아이가 있는, 가뜩이나 어린 아기가 있는 요즘은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아내는 24시간 집에서, 나는 퇴근 후 집으로 다시 출근하는. 인스타에 보이는 즐거워 보이는 여행지,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보며 '언젠가는, 언젠가는 가자.'라고 미룬다. 매일 저녁 아이가 잠든 고요함 속에서 식탁에 앉아 오늘 하루 동안 이 전투를 무사히, 하지만 치열하게 버텨낸 것을 서로 격려한다. 같은 식탁에서 아이의 미래, 우리의 미래, 더 나아가 우리 가족의 미래를 그리면서 개인적인 고민들도 나누다 보면 사랑과는 또 다른 단단하고 견고한 무엇인가 우리를 감싸주고 있음을 느낀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우리는 더 강해지고 돈독해진다. 이렇게 점점 부부가 되어간다. 이렇게 점점 하나의 예쁜 가족이 만들어져 간다. 무어라 설명할까.

잔을 들어 무심하게 한 잔 털며 이야기한다.


"결혼? 좋지. 아내랑 나는 이제 점점 전우애로 뭉쳐가는 거지."


결혼 생활을 오래 하신, 자녀들이 모두 장성한 중년의 부부에게 물으면 꼭 그렇게, 전우애라고 하시더라.

결혼한 지 끽해야 3년밖에 안 된, 초보 아빠 초보 남편이 감히 그 감회에 비할 수나 있겠나 마는, 나 역시 이 감정을, 점점 우리를 감싸 오는 따뜻하고 아늑하지만 단단한 이 무언가를 전우애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제는 선배가 그 날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왜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또, 왜 나는 그 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너도 나아-중에 결혼해봐라. 내 말이 뭔 말인지 알 거다.'라고 하던 선배의 말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오늘도 아내와 등을 맞대고 전쟁터로 나간다.


프로포즈할때 멋모르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서야 조금씩 알아가면서, 우리는 오늘도 함께, 조금씩 성장해 간다.

우리,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가자.
그대가 앞에 서면 내가 뒤에 설게.
언제든 돌아봐, 내가 뒤에 있을게.
그대가 힘들어하면 내가 뒤에서 밀어줄게.
내가 힘들어하면 그대가 앞에서 끌어줘.
우리, 그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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