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통
꽃길을 걸었다. 떨어진 예쁜 꽃잎을 줍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 꽃을 집 마당에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 꽃씨를 사서 마당에 잔뜩 뿌렸다. 어떤 새싹이 먼저 올라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화단을 보니 새싹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었다. 어떤 씨앗은 들을 품고 있었고 어떤 꽃들은 해풍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라즈베리 나무를 보고 있자니 청량한 숲에 빨간 산딸기가 떠올랐다. 옆 귀퉁이 뿌리지 않은 들꽃이 샐쭉하게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며 올라왔다. "넌 누구니?" 실눈으로 입 꼬리를 내리고 뒷짐을 지고 물었다. 부끄러운 고개를 살포시 들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따라온 꽃반지 꽃이에요" 사랑스러운 대답에 그만 피식 웃으며 이주를 허락했다.
들꽃이 만개하던 들녘에서는 지난 사랑이 생각났다. 송곳이 박혀있는 상처가 다시 들썩 거렸다. 감춰 두었던 시간들이 살아나서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들이 되돌아오는 날이면 술에 취한 듯 음악으로 밤을 새웠다. 그 밤들이 모여 가슴에 방을 만들었다. 시간이 되는 날은 혼자 방 안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그러면 천천히 그날 밤이 되어 쓰린 가슴이 아파온다. 나는 이렇게 가끔 나를 만나러 간다. 그때에 나는 풀섶에 앉아 토끼풀을 꺾어 꽃반지를 만들고 있다. 아픈 나를 만나러 가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아프지만 자꾸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속이 비칠듯한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그날이 떠오른다. 내생에서 가장 평온했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필리핀에 아름다운 바다를 품고 있는 숙소를 잡았다. 차를 한잔씩 들고 바다에 우뚝 솟은 방갈로 정자로 향했다. 그곳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남편과 아이는 각자의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고요한 침묵을 파도 삼아 바람을 만끽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평온이 찾아왔다. 머리칼을 넘기는 바람이 내게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냐고 말했다. 나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다. 건네준 상자를 열어보니 행복이 들어있었다. 바람은 한동안 나를 훑고 내 머리칼을 가지고 놀더니, 나를 다시 만나러 오라는 말을 하고는 떠났다. 그날 나는 바람의 방을 만들었다. 그리곤 가끔씩 그 방에 들어가 그날을 회상한다. 멈춰버린 고요함이 천국처럼 나를 감싸던 시간을 느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자연스레 방문이 열리고 바람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이른 아침 옷을 대충 입고 물한병을 가지고 산에 올랐다. 어떤 책에서 읽으니 산은 완등 하는 것이 아니고 숲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정상을 찍는 걸 좋아하던 나는 그 말에 너무 창피해졌다. 다른 마음으로 숲을 걷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대권 작가님의 야생초 편지'가 생각났다. 작은 풀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제비꽃들이 방긋방긋 웃으니 나도 몰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비오는날 흙물을 뒤집어쓴 풀들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 같아 보였다. 작은 돌멩이 하나에 몇백 년을 거듭 어 왔을까 생각하니 숭고하고 대견한 생각도 들었다. 그날은 숲을 들여다 보고 가다를 반복했다.
벼락을 맞아 몸통 반이 반으로 갈라진 나무가 있었다. 양옆의 나무를 비켜 넘어져 다행이었다. 다른 나무에 피해를 주지 않고 홀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몸통은 살아서 갈라진 나무가지에 새싹이 올라왔다.
눈을 감고 나무를 안고 말을 걸었다. 얼마나 아팠느냐고 물으니 나무가 대답했다. 당신이 와주어서 괜찮다고. 자신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흐르는 침묵 속에 위로를 건넸다. 놀라고 무서웠을 텐데도 나무는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다른 나무를 돌봤을 마음이 갸륵해 한참을 거기 있었다. 책을 깔고 앉아서 음악을 들려주었다. 잔잔한 피아노곡이 좋았는지 나무 밑 풀들이 살랑였다.
가끔은 하늘을 보고 사람을 떠올린다. 파란 스케치북에는 모두가 담긴다. 당신과 나는 살아서 파란 스케치북 속에서 비와 바람을 만나고 꽃을 키우고 집을 짓는다. 바람이 불어오면 들녘으로 나가고 눈이 오면 장작불을 떼고 고구마를 굽는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스케치북 안에서는 가능하다. 그곳에 모든 시간은 나와 당신이 있어 가능하다. 나는 마음에 집을 짓고 마당에 씨를 뿌린다. 당신과 살집에서 꽃을 피우고 물을 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