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통
나는 초식동물이다. 편식을 좀 하는 편인데, 다 잘 먹지만 많이 먹지는 않는다. 좋아해서 잘 먹는 건 아니고 그냥 있어서 먹는 정도이다. 어제 내가 좋아하는 꽈리고추를 먹다가 너무 매워서 속이 홀라당 벗겨지는 줄 알았다. 그 덕에 너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듣게 됐다. 꽈리고추가 청양고추 옆에서 자라면 자기도 맵다는 것이다. 자기가 청양고추인지 알고.. 맵다는 말이 나는 너무 귀여워 한참을 웃었다.
고추가 자기를 청양고추라고 착각하다니, 얼마나 귀여운가. 옆에서 매운 친구가 있으니, 덩달아 나도 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내 옆자리 친구가 공부를 잘하면 나까지 똑똑해진 것 같은 기분, 멋쟁이와 함께 걸으면 나도 괜히 어깨가 펴지는 기분 같은 것일까.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곧잘 옆사람의 성질을 닮아 간다. 좋은 기운 옆에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밝아지고, 늘 불평만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불만이 늘어난다. “꽈리도 옆에도 청양이 있으면 맵다”는 말은 어쩌면 농부의 지혜가 아니라 인생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귀여운 꽈리고추를 닮고 싶다. 원래는 순한 맛이지만, 곁에 있는 이의 영향을 받아 더 강렬해질 수 있는 존재. 그렇다고 본성을 잃는 건 아니니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 여전히 꽈리이데, 잠시 청양처럼 매워질 수 있다는 것. 진정한 자존이다.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는데 예전 농부들은 참외밭 근처에 수박을 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뭐냐면 참외가 수박 향이 묻어서 덜 달아진다고 믿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토양 영양분 경쟁이나 관리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농부들끼리는 “수박 하고 참외는 사이가 안 좋다”라는 속담처럼 내려왔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참 닮았다고 느낀다.
엄마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질 안 좋은 친구 사귀면 너도 닮는다.”
어쩌면 참외와 수박이 함께 자랄 수 없다고 여긴 농부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옆에 있는 친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나도 모르게 말투가 바뀌고, 습관이 변하고, 결국엔 성격까지 닮아간다. 밝은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괜히 웃음이 많아지고, 늘 불평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어느새 나도 세상을 삐딱하게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도 결국 흙에서 자라는 작물과 다르지 않다.
누구와 함께 뿌리를 내리고, 누구와 가지를 뻗으며 자라느냐에 따라 달콤해지기도 하고, 씁쓸해지기도 한다. 참외밭 옆에 수박을 심지 않았던 농부들의 선택은 단순한 농사법이 아니라 삶의 은유처럼 다가온다. 함께 있는 존재가 곧 내 삶을 만든다.
식물의 뿌리는 본능적으로 물이 있는 곳을 탐지한다고 한다. 나도 본능적으로 좋은 사람들을 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늘 선한 사람들 곁에 둥지를 트는 편이다. 선한 사람들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괜히 내 장점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머물러도 괜찮은 기분이고 마치 촉촉한 땅에 뿌리를 내린 듯 삶이 고르게 쉬어지는 느낌이다.
사람이란 결국 자기가 기댄 곳의 색깔을 닮아간다. 메마른 땅에 뿌리내린 식물은 금세 시들고, 물이 풍성한 땅에 뿌리내린 식물은 잎이 싱싱해진다. 내 옆에 누가 있는지가 결국 나를 키운다. 선한 사람 곁에서는 나도 조금은 더 부드럽고, 조금은 더 따뜻해지는 것 같다.
나는 내 안의 뿌리를 믿는다. 본능적으로 좋은 기운을 감지하고, 그 곁에 머물러 자라려는 마음을 말이다.
인생이라는 밭에서도 좋은 사람 곁에 뿌리내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