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쑥한 신사

수필통

by 이음

지하철 아침, 늘 같은 칸에서 마주치는 남자가 있었다.
운동화에 청바지, 재킷을 걸친 세미정장. 흐트러짐은 없었지만, 지나치게 단정한 것도 아니었다. 말쑥하단,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책을 읽던 회사원이었다.
자유로운 복장이 나의 방패였고, 동시에 무심한 스타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는 자꾸 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그의 손에 든 책을 보고 나는 내심 반가웠다.
내 가방 속에서 꺼내 들고 있던 책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지하철 흔들림 속에서, 우린 같은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셈이 아닌가. 서로 다른 옷차림, 다른 궤적을 가진 삶이지만 책 하나의 공통점이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꿔주었다.

며칠 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교대역 근처의 스타벅스였다. 그는 커피를 가져온 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작가였다.

나는 일부러 그의 옆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커피 머신의 소음이 들리는 자리였다. 어쩌다 그는 인쇄물 한 장을 떨어뜨렸고 나는 얼른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 주었다. 짧은 눈빛 교환과 고개 숙임, 그게 우리의 전부였다.

잠시 후 그는 가방을 챙겨 떠났다.
나는 미팅 시간을 기다리며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바닥에 인쇄물 한 장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가 미처 챙기지 못한 원고였다.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사랑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건 한 사람을 오래도록 생각한다는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뜰 때도, 하루의 끝에 눈을 감을 때도, 문득 걸음을 멈춘 순간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을 향한 마음 하나가 내 삶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건 그리움 뒤에 따라올 아픔까지도 감수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더라도, 지금의 따뜻한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리움은 달콤하지만 동시에 쓸쓸하다. 그러나 그 쓸쓸함마저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을 한다는 증거였다.

사랑한다는 건 언제나 나보다 너를 먼저 두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네가 편안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네가 듣고 싶어 할 말을 먼저 떠올렸다. 사랑은 ‘나’라는 중심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를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보내주는 것도 기꺼이 이어야 했다. 손을 꼭 잡고 싶은 순간에도, 네가 가야 할 길이 있다면 놓아줄 수 있어야 했다. 붙잡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었다. 떠나는 너를 바라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네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그게 진짜 사랑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네가 웃을 때 내가 더 크게 웃는 것이었고, 네가 울면 나의 가슴까지 함께 젖어드는 일이었다. 내 하루의 크고 작은 감정이 네 표정 하나에 따라 흔들렸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때로는 아무 말도 없이 눈빛 하나로 서로를 알아듣는, 그 기적 같은 순간이 사랑의 모습이었다.

사랑한다는 건 네 하루의 안부가 곧 내 하루의 기도가 되는 것이었다. ‘오늘 너는 괜찮을까, 잘 지냈을까’ 하는 질문이 늘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네가 없는 자리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빈자리를 통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건 끝내 붙잡지 못할 순간에도, 너의 자유를 응원하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너를 두고 싶은 마음보다,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사랑의 가장 성숙한 얼굴이었다.

결국 사랑한다는 건… 네가 있기에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일이었다.
내가 사랑을 통해 배운 건, 행복도 슬픔도 두려움도 결국 모두 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지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너를 사랑한 나의 흔적이었다.

나는 한 줄,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갈수록 숨이 가빠졌다.
마치 내 안의 오래된 감정을 누군가 대신 꺼내 적어 놓은 듯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끝이 떨렸다.

종이를 움켜쥔 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그가 사라진 거리로 뛰어 나갔다.

나는 종이를 꼭 쥔 채, 그의 흔적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