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여기요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저녁이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내려앉았고, 도로 위엔 노란 가로등 불빛이 번져 있었다. 와이퍼가 리듬을 타며 앞유리를 닦아낼 때마다, 세상이 잠시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나는 그 흐려졌다가 또 맑아지는 순간 속에서 운전을 이어갔다.
“어서 오세요.”
조심스레 뒷문이 열리고, 젖은 우산을 든 손님이 타올랐다. 흔히 비 오는 날은 택시가 귀해진다.
손님이 목적지를 말하자 나는 그 방향으로 차를 부드럽게 몰았다.
“아저씨, 힘드시죠? 이런 날은 특히.”
손님이 말을 건넸다.
“뭐, 뭐… 이제 익숙하죠. 도로 사정만 괜찮으면 괜찮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한마디 속에는 수십 번의 한숨과 수많은 날들이 담겨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손님이 문득 말했다.
“저 오늘 면접 보고 오는 길이에요.”
백미러 너머로 보니, 손님의 손에 작은 명찰 케이스와 휴대폰이 함께 쥐어져 있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코트 자락은 조금 무거워 보였고, 그 모습만으로도 하루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땠어요? 잘 보셨어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손님은 씁쓸하게 웃었다.
“모르겠어요. 질문에는 성심껏 답했는데,
면접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그냥 웃기만 하더라고요. 나이가 많다고, 요즘은 젊은 사람들을 선호한다고…”
차 안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속도를 조금 늦추고, 그의 하루가 덜 흔들리도록 차를 조심스레 모는 것뿐이었다.
그때, 띵 동 하고 작은 소리가 울렸다.
손님이 움찔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놀람과 긴장으로 일그러졌다가, 이내 천천히 환해졌다.
“아저씨, 잠깐만요..”
손님이 숨을 크게 고르며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 오늘 면접 결과 확인 후, 2차 면접 일정 안내드립니다.
2차 면접은 이번 주 금요일 오전 10시.”
손님의 눈가에 반짝이는 빛이 스쳤다.
그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까까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봄날의 따스한 바람처럼 환해지는 것 같았다.
“아저씨.. 붙었어요. 저 2차 면접 가래요!”
손님이 믿기지 않는 듯 연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와… 진짜 오랜만이에요. 이런 연락… 제가 오늘 택시 탄 것도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와, 손님 축하드립니다! 이런 날은 그냥 걸어도 비가 반짝거려 보일 거예요.”
손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웃었다.
“아까까진 비가 참 우울했는데, 지금은 그냥 반갑네요.”
비는 다시 굵어졌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이제는 축하의 박수처럼 들렸다.
손님은 한동안 휴대폰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손님, 사실 저도 한때는 많이 두려웠어요.”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손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예전엔 회사 다니던 사람이었거든요.
거기서 20년 넘게 일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와야 했죠.
그때 제 나이가 마흔여덟이었어요.”
손님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잠시 웃으며 빗길을 조심스레 몰았다.
“한동안은 막막하더군요. 이력서 넣어도 연락은 없고,
가족들 얼굴 볼 자신도 없어서 매일 늦게 들어가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개인택시 기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나는 그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길이야 계속 있으니. 차만 몰아요.
사람도, 돈도, 시간도 결국 돌아오게 돼있으니’
그 말이 이상하게도 제 마음을 붙잡아 주더라고요.”
손님은 조용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저도 무섭고 떨렸어요. 택시 첫 손님 태울 때, 손이 얼마나 떨리던지요. 하지만 하루, 또 하루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씩 용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길 위의 손님들이 내 인생의 새로운 지도였다는 걸요.”
차 안은 잠시 잔잔해졌다. 손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저씨, 말씀… 정말 큰 힘이 돼요.”
손님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도 잘 해내실 겁니다. 오늘 2차 면접 소식 들으셨잖아요? 저처럼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신감이 들어설 겁니다.”
도착지에 다다랐을 때,
손님은 휴대폰을 꼭 쥐며 말했다.
“아저씨, 오늘 이 택시가 제 첫 손님 같네요. 다시 시작할 용기가 조금 생겼어요.”
손님이 내리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와이퍼를 한번 더 움직였다.
세상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그날 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택시는 사람을 목적지로 옮겨주지만,
가끔은 마음까지 함께 옮겨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