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아내의 마음

택시 여기요

by 이음


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늦은 밤이었다.
도로 위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반사되어 길은 마치 끝없는 강처럼 반짝였다. 와이퍼가 앞유리를 좌우로 오가며 세상을 잠시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다가 금세 다시 흐릿하게 만든다.

오늘은 손님이 드물었다. 비가 오면 택시가 귀해지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거리는 조용했다. 나는 역 근처 골목에 차를 세우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과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졸음을 쫓고 있었다.

그때였다.
“기사님! 여기!”
젖은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우산도 없이, 셔츠는 비에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멀리서도 진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어서 오세요.”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뒷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 안에 술 냄새가 한순간에 가득 찼다.

“어디로 모실까요?”
내가 묻자, 남자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했다.


“청암동 현대아파트요…”
목소리가 흐릿하고, 혀가 꼬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비로 젖은 길이 미끄럽게 빛났다. 이 손님은 조심스럽게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저씨… 오늘이 제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나는 백미러로 그를 바라봤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흐르는 빗물, 그리고 술에 젖은 눈빛 속에 스며 있는 서글픔.

“아… 그러셨군요.”
내가 짧게 대답을 했다.
남자는 내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했다.

“올해가 10주년이었어요.
아침부터 꽃집 들르고, 아내가 좋아하는 와인도 사고,
좋아하던 초밥집에서 포장까지 해놨는데..
아무도 없더라고요.
집이, 그냥 텅.. 비어 있더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작고 처연하게 울렸다.

"한 달 전부터 별거 중이었습니다. 아내가 더는 못 살겠다고… 나와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네요.
저는 그저 오늘만큼은 돌아오길 바랐습니다.
제발 오늘만은… 우리 함께 저녁을 먹자고요.”

그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근데요, 아저씨.”
남자가 손을 내리고 허공을 바라봤다.
“아내가 떠난 그 집에 혼자 앉아 있으니… 숨이 안 쉬어지더군요.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아서, 그냥 뛰어나왔습니다.
뛰고, 또 뛰고…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지도 몰랐어요.”

나는 그저, “네…” 하고 짧게 반응할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처연해서
괜히 위로의 말을 꺼내면 그 마음을 더 아프게 할 것 같았다.

비는 점점 굵어지고, 차 안 공기가 더욱 눅눅해졌다.
남자는 계속해서 흐느끼듯 말했다.
“우리 사이가 처음부터 이렇게 나빴던 건 아니에요.
연애할 땐… 그 사람이 세상 누구보다 빛나 보였거든요.
아이가 태어나고, 집 대출 갚느라 허덕이면서도
나는 그저 ‘우리가 함께라면 괜찮다’고 믿었어요.”

그의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아내는 점점 멀어지고, 저는 하루하루 버티는 데 급급했고…
어느 순간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게 괴로워졌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작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하.. 오늘만큼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냥 같이 밥 먹고, 웃고… 그게 전부였는데.”

차 안은 정적에 잠겼다. 비 소리만 규칙적으로 떨어졌다. 나는 백미러 속 그의 흐릿한 눈빛을 바라보며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차가 멈추자 남자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비에 젖은 발을 아스팔트 위로 내리며..

“기사님…”
그가 잠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누가 제 얘기를 들어준 게… 오늘 처음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만원짜리를 쥐어주곤 우산도 없이 비 속으로 걸어갔다. 비틀비틀하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에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빗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와이퍼를 한 번 더 움직이니 유리창 너머로 흐릿한 세상이 잠시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애석해졌다.

택시는 사람을 목적지로 데려다주지만,
떠나버린 마음까지는… 끝내 데려다줄 수 없다는 걸
그날 밤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