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닿다
어제는 아이가 영화를 보자고 말했다, ‘나는 가끔 왜 태어났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한다고 말했다. ㅎㅎ 귀여웠다. 12살이 생각하기에는 조금 빠르지 싶었지만 기특했다. 아들은 설득을 시작했다.
“근데 엄마 이 영화는 인생을 얘기해 준데,
친구들이 봤는데 엄청 재밌고 교훈이 많데”
“그래. 뭔데?”
“보자. 검색해봐”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이라는 디즈니 영화였다.
처음에는 그냥 그래 보였다. 별 재미없어 보였지만 참고 보다 보니 맘이 달라졌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랬다. 인생의 열정 또는 꿈을 불꽃이라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우리는 그게 내 삶에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되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 모든 순간이 삶이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삶에 목적이란 없었다. 그저 작은 순간순간들을 빛나게 보고 느끼는 것이 삶에 불꽃이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기도 하고 못 살기도 한다고 말한다. 연연하고 집착하는 삶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잡고 있던 동아줄을 내려놓은 듯 후련하다가 공허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열정을 쏟아부었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인 경우가 많았다. 부어도 부어도 차지 않는 독도 있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처럼 내 가슴에 독을 던져 채울 수만 있다면 나도 던져 채우고 싶다. 하지만 나 외의 삶을 내가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내 새끼도 내 맘 데로 안 되는 게 사람이다. 누군가의 삶과 맞닿아 뗄 수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전에 듣던 DID 강사 코칭 수업이 있었다. 강사님이 수업에서 말씀하셨다.
“힘든 것을 티 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힘든 티를 내면 도망갑니다”
“미래가 발전적이어야 사람들이 따르고 모여듭니다”
“절대 힘든 티를 내면 안 됩니다”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차분한 분위기로 모두들 끄덕이고 있었다.
맞는 말씀인데 왠지 마음이 슬퍼졌다. 나는 잘 드러내지 않으려 동굴로 들어가는 성향이지만 그래도 쓸쓸해졌다. 전에 봤던 책에서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 속을 감추고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게 인간사라는 게 쓸쓸했다. 누구나 부정적 얘기는 힘들다. 듣고 싶은 이도 없고 한 없이 들어주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상처 받은 사람을 치유하는 것도 사람일 텐데~
그래도 누군가는 어깨를 빌려주고 서로의 날개가 되어 주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아픈 사람들도 회복되어 또 다른 누군가에 어깨가 되어주면 좋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나 공허하고 쓸쓸한 삶이 인간 같다.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 주며 어떤 깊이 있는 관계를 맺고 서로의 시간에 의미 있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시간은 장미도 여우도 길들여지지 않을 시간일
것이다. 모순이며 맞기도 한 말이라 나는 어렵다.
영화를 보고 죽음에 관한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어 슬프고 처연한 삶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이 기억해 주는 것이 가지고 가는 영혼들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순간을 느꼈던 감정과 느낌들, 그것은 온전히 내가 가져가는 나의 불꽃이고 삶이었다. 그러니 죽음을 그리 슬퍼할 일도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남겨둔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가슴 아프지만 허망한 삶은 없을 것 같다. 살았던 모든 순간이 불꽃이었고 그것이 삶이었기 때문이다. 살아 봤으니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먼저 가있을 뿐이다.
그래서 난 오늘이 매우 소중해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차를 타고 나갔다. 바람을 쐬러 나갔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꽃이 만발하는 길을 달렸다. 선루프를 열어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눈부신 오후를 만끽했다. 지금 이곳에도 나의 불꽃을 남기고 잠든다. 모든 순간이 빛나는 하루였다.